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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에 들기름 한 방울, 여행 피로 날아갑니다

숲길 걷고 붉은 들판 지나, 딸의 상견례까지... 추석 가족 여행기

by 김남정

올해 추석 연휴 중 지난 9일부터 11일, 우리 가족은 제천과 영월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다. 숲길을 걷고 붉은 메밀밭을 지나 마지막 날엔 내년 3월 결혼을 앞둔 큰딸의 상견례까지, 보름달처럼 꽉 찬 명절이었다.



해마다 추석이면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차례를 지내며 양가 가족과 지냈다. 몇 해 전부터 시댁과 친정이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추석 연휴는 명절 음식을 만들던 시간에 영화도 보고 온천도 가며 여유롭게 시작했다.



연휴 중반인 9일, 우리 가족은 충북 제천의 숲 속 숙소에 묵기로 했다. 큰딸과 작은딸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다섯 명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큰딸 차를 타고 출발했다. 여주의 한옥 카페에서 작은딸 부부와 낮 12시에 만나 빵과 커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제천으로 향했다.


IE003533852_STD.jpg ▲제천 숙소 숲 속 공기가 너무 좋았다. ⓒ 김남정

추석연휴에 떠난 여행


제천 숙소로 가는 길은 가을이 한창이었다. 황금색 논과 밭에는 노랗게 물든 콩잎이 너무 아름다웠다. 국토의 70%가 산인 것을 실감 나게 하는 산 넘어 산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였다. 치악산 허리를 굽이 돌 때의 공기는 내가 사는 곳의 공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초록 잎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와 굽이치는 꼬불 길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짐을 풀자마자 숙소 뒤편 숲길로 향했다. 가을빛이 완연한 숲은 고요했고,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이 황금빛 비단처럼 반짝였다. 맑은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명절답게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젊은 부부, 부모님과 함께 산책하는 자녀들이 정겹고 따뜻했다.



IE003533853_STD.jpg ▲한반도 지형한반도 지형 전망대에서 본 풍경. ⓒ 김남정




둘째 날 아침, 가을비가 살짝 내렸다. 우리는 우산을 챙겨 영월로 향했다. 한반도 지형 전망대는 몇 해 전에 와 본 곳이지만 그래도 새로웠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나무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어 나이 드신 어른이나 어린이도 걷기에 무리가 없을듯했다. 천천히 데크 길을 걷는데 작은 사위가 내게 묻는다.



"장모님 저 나무는 무슨 나무예요?"



"응, 무궁화 꽃나무야."



"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평소 식물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아이들은 식물 박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꽃이 다 져서 무슨 나무인지 궁금했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20여 분 정도 지나 한반도 지형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본 풍경은 흐린 날씨와 구름 때문에 더 멋스러웠다. 비에 젖은 한반도 지형 전망대는 마치 구름 속에 잠긴 듯 신비로웠다.



굽이치는 동강이 한반도의 형태를 그대로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이 산과 어우러져 마치 그림 속 장면처럼 느껴졌다. 강물이 만들어낸 곡선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흐르며 빚은 자연의 예술품 같았다. 영월은 석회암 지대의 대표적인 지역으로, 수천만 년의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이 깎아낸 절벽과 동굴이 곳곳에 자리한다. 땅의 결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곳, 그 세월의 흔적이 고요히 쌓인 풍경이었다.


IE003533854_STD.jpg ▲붉은 메밀꽃 붉은 메밀꽃이 비를 맞아 더 운치 있었다. ⓒ 김남정


붉은 메밀꽃을 아시나요



전망대에서 내려와 동강 변으로 가니 붉은 메밀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먹골 마을에서 오는 19일까지 열린다고 한다. 붉은 메밀의 원산지는 네팔 히말라야라고 한다. 영월에서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져온 관상용 붉은 메밀을 심었다고 한다. 흰 메밀꽃만 봤던 나는 붉은 들판이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빗방울에 젖은 붉은 꽃잎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했다.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메밀밭 사이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동강의 물안개와 붉은 메밀이 어우러진 풍경은 가을 정취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약 1km 붉은 메밀 꽃밭과 황하 코스모스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동강 절벽엔 큰 구멍이 있는데 '먹군'이라고 한다. 길이가 수십 미터라 하는데 뗏목 타고 가까이 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먹군' 앞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추억을 남겼다.


IE003533855_STD.jpg ▲들기름 두부구이들기름 향이 고소했다. ⓒ 김남정



저녁은 들기름 향이 고소한 두부구이와 버섯찌개, 그리고 삼겹살이었다. 제천은 들기름과 두부로 유명한 고장이다. 제천은 산 좋고 물 맑은 고장답게 음식도 정갈하다. 청풍호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진 들녘에서는 예로부터 들깨가 잘 자라, 고소한 향이 진한 들기름은 제천의 명물로 손꼽힌다. 장터나 농가에서 직접 짠 들기름은 향만 맡아도 입안에 고소함이 번진다.



맑은 물로 빚은 두부도 빼놓을 수 없다. 제천 하소동 일대의 손두부집들은 매일 새벽 지역 콩을 갈아 만든다고 한다. 갓 만들어 따뜻한 두부에 들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간장에 찍어 먹으면, 단순하지만 깊은 제천의 맛이 느껴진다. 남편과 큰 딸은 "이렇게 단순한 식사인데 왜 이렇게 맛있을까?" 하며 감탄했다.



아마도 좋은 재료와 맑은 공기가 한 몫한 게 아닐까 싶었다. 갓 부친 두부 위로 들기름 한 숟갈 두르니 고소한 향이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부드러운 두부와 담백한 버섯 찌개 한 숟가락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지역의 맛이란, 단지 음식이 아니라 그 땅의 공기와 사람의 정성이 어우러진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날,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청주였다. 내년 3월 결혼을 앞둔 큰딸의 상견례가 예정돼 있었다. 제천 숙소를 나서며 살짝 긴장했지만, 예비 사돈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식탁 위에는 정성과 배려가 가득했고, 서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통했다.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예비 사부인께서는 친정 오라버니가 운영하시는 속리산 근처 농장에서 금방 딴 샤인머스캣 두 상자를 선물로 주셨다. 달콤한 포도향이 차 안을 가득 채우며 이번 여행의 끝을 장식했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려 차창 밖으로 떠오르는 달은 보지 못했지만 행복했다. 제천의 숲 길, 영월의 동강, 붉은 메밀밭, 그리고 가족의 웃음까지. 이번 추석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따뜻했다. 보름달처럼 마음이 꽉 찬 잊지 못할 가을 여행이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72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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