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시인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외부를 전달하는 역활보다는 외부를 차단하는 역활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이 외부를 무한정 인체에 전달할 경우 인식 자체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인식은 대사을 선별하고 재조직하는 주체적 실천입니다. 영상서사 양식은 그 압도적 전달력에도 불구하고 인식 주체를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식 주체를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는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인 셈입니다. 우리의 세계 인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공부는 진실의 창조로 이어져야 합니다.
만약 저분이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각색해서 들려주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색한 인생사에는 이루지 못한 소망도 담겨 있고, 반성도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실제 인생사와 각색된 인생사를 각각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전자는 '사실'이라고 하고 후자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저 노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망과 반성이 있는 진실을 주인공으로 그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늘 이야기하던 일정 시대의 해방 전후의 험난한 역사가 그의 진실을 각색한 것이 사실로서의 그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려고 할 때가 시가 실패하는 때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듯이 우리의 정서도 그렇습니다.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의 어느 한 줄기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변화를 읽으려 할 경우 시는 대단히 뛰어난 관점을 시사합니다. 기승전결이라는 시의 전개 구조가 그렇습니다. 먼저 시상(詩想)을 일으킵니다. 기(起)라고 합니다. 다음 그 상황이 일정하게 지속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승(承)입니다. 이러한 양식 축적의 일정한 단계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적 변화입니다. 그것을 전(轉)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화된, 다시 말하자면 기 승 전의 최종적 완성형으로서의 결(結)로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기승전결은 사물의 변화나 사태의 진전을 전형화한 전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란 그런 점에서 '변화의 틀'이기도 합니다. 사물과 사물의 집합 그리고 그 집합의 시간적 변화라는 동태적 과정을 담는 틀이며 리듬이기도 합니다.
기승전결이 4단계임에 비하여 헤겔 변증법은 3단계입니다. 대비한다면 기(起)와 승(承)이 합해서 정(正)이 되고 있습니다. 전(轉)과 반(反)은 같습니다. 그리고 결(結)과 합(合)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이러한 대비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동양과 서양의 차이입니다. 동양의 변화와 서양의 변화는 그 전개 과정이 다릅니다. 서양의 전개 구조에서는 정과 반이 직선적으로 바로 부딪칩니다. 동양에서는 기와 전 사이에 승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습니다. 그 진행이 지지부진하고 금방 반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당 기간의 숙성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양적 축적 기간이기도 합니다. 소나타의 형식도 이러한 변화의 틀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시, 전개, 재현, 종결이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