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우경적으로 하라고 하는 까닭은 아마 일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 사람과 더불어 일해야 합니다. 전통과 주어진 현실의 조건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천은 함께 일하는 사람과 많은 분들의 정서와 이해관계를 충분히 담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우경적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작품을 가지고 그러한 경로를 밟아 가는 것이 현실을 존중하는 우파적 정서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론을 좌경적으로 하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여 보다 나은 미래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모든 실천은 그러한 이상을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갑니다. 실천의 경험을 정리하면 이론이 됩니다. 이 이론은 다음 실천의 지침이 되고 동시에 그 진리성이 검증되면서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집니다.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좌와 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현실을 바꾸어 가는 것이 역사의 기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 속에서 크게 억압을 느끼지 않고 나름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조건을 바꾸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과 체제가 억압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각각 다른 사회적 집단에 의해서 담보되기 떄문에, 이상과 현실은 서로 충돌하고 다투는 형식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 이상과 현실의 변증법적 통일 과정에 대해여 열린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9호선 지하철은 급행이 있습니다. 완행 타고 앉아서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고 서서 가더라도 빨리 가려고 급행으로 갈아타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떠한 개혁 실천의 경우라 하덜라도 당대 사람들의 보편적 공감 속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실천은 우경적으로"라는 금언이 비전향 장기수의 이야기여서 순간 충격적이었습니다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하는 체 게바라의 평전을 보면,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리얼리스트가 되라,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이상은 반드시 하나씩 가져라." 현실을 존중하되 이룰 수 없는 꿈, 그걸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현실의 조각 그림을 뛰어넘어 현실을 창조하려는 바로 이상과 현실을 결합하려는 노력이 닐까 생각합니다.
낭만은 불어 '로망' roman의 번역어입니다. '이야기'란 뜻입니다. 논리 체계를 갖추지 않은 서술 일반을 '로망'이라고 합니다. 낭만주의는 체로 부정적 의미로 읽힙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의 결별이었습니다. 고전주의는 질서, 구도, 이념 등 그야말로 고전적 질서를 기본으로 합니다. 그에 비하여 낭만주의는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하라고 했듯이 서구적인 사고의 저변에는 논리와 분석이 있습니다. 낭만적 사조에 대해서는 당연히 폄하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낭만주의자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분명한 목표 지향성이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 없이 막연히 싫어하고 거부하는 태도, 이성보다는 감성에, 주제보다는 기법에 기울어 있습니다. 틀에 갇혀 있는 것들에 원천적인 거부감을 낭만주의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분방함이 한편으로는 무책임하다고 폄하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메타 meta 지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바로 이런 '메타' 지향성에서 시작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중에서 가장 완고한 것이 '인과론(因果論)입니다. 사물을 원인과 결과 관계로 질서화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과 관계가 현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因)과 과(果)는 순방향뿐만 아니라 역방향의 화살표도 있습니다. 인(因)이면서 동시에 과(果)이기도 합니다. 인과 과는 일반적 선형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방향의 화살표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특정한 시공(時空)이라는 정태적 모델에 한정했을 때에도 그렇거든 하물며 시공의 변화를 포괄하는 동태적 모델에서는 더욱 역동적으로 전개됩니다. 인과론이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환원론 그 자체입니다. DNA를 생명의 궁극적 요소로 환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환원론과 인과론이 근대 인식의 기본 틀입니다. 지극히 단순화된 기계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극본을 환원하면 A, B, C, D……알파벳의 나열이 됩니다. <햄릿>의 비극적 플롯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시키는 것, 하나의 원인으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 그런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사고방식이 환원론이며 인과론입니다. 이러한 논리 속에는 마투라나의 생명체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문사철과 시서화를 함께 연마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아울러 연마하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 하나하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입니다. 그런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思考)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品性)의 문제입니다. 생각하면 시적 관점과 시적 상상력이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키 작고 머리도 벗어진 소크라테스는 1년 내내 같은 오버코트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 행색으로 던지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도덕적 언어는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크게 보면 '나 자신'에 대한 통절한 깨달음이 기쁨으로 승화되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결코 열(悅)하지 않습니다. 공자도 그런 점에서 정치 영역에서는 실패한 사람이고 봅니다. 14년간 여러 나라를 유랑했지 자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실패가 공자로 하여금 사상가로 비약하게 하고 만세의 목탁(木鐸)으로 남게 했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실패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사상가로서도 비판받았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꾸며서 어리석은 사람을 모욕하고(飾智而驚愚) 자신의 행실을 닦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나게 했다는 것입니다(修身而明汚).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교언영색(巧言令色)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말씨와 외모를 꾸미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귀곡자는 반대로 그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관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귀곡자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
언어에는 분명 언어 자체에 개념적 의미와 함께 언어 외적인 정서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삶 속에서 경작된 그 사람의 인품과 체온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언술(言述)이 더 중요합니다. 언어도 결국은 언술을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이공계나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구사하는 언술의 특징은 더 많은 팩트를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에 도움이 되는 플러스 팩트를 쌓아 가는 방식입니다. 수평면을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언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주장을 그와 반대되는 것과 대비함으로써 그것의 특징을 부각시키기도 하고, 시간적 변화 속에 그것을 배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확장하고 시각화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치 시적 관점처럼 동서남북 춘하추동의 다양한 시각에서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시(詩)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어의 왜소함입니다. 그 왜소함을 뛰어넘는 다양한 방식을 승인하는 것이 어쩌면 시적 레토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 그러한 레토릭을 다양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귀가 어둡다'고 하고 '눈이 높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를 많이 읽어야 합니다.
나는 근대 인식틀에 갖힌 환원론과 인식론에 중독자인 듯하다. 거기다 시알못. 아니 시느못. 3장에서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의 등장과 구성주의 설명이 언뜻 와닿지 않아 여러번 읽었고 그의 저서 몇 권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뜻이 통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서 성질이 발딱발딱 나는 하수라 뭐든 뭐든 박살을 내야 직성이 풀리고 만다. 이 지랄같은 성격이 내 몸을 관통할 때 나는 그냥 몸살이 난다. 내몸박살, 내맘박살. 그래서 나는 내 나팔수를 책에서 찾을 때가 많다. 시끄러운 속을 단 한방에 제압해주길 바라는 포성같은 것, 한 방의 일갈 같은 것을 찾았다. 미치도록 가렵고 따가운 내 마음. 가려운 곳을 피가 날 때까지 긁다가 아프면 멈춘다. 그러다 또 도지면 상처난 것을 또 긁는다. 그런 나의 병적인 형편없음을 한스럽고 원스럽게 슬퍼했다.
그런데...
쭈욱 읽다 귀곡자(鬼谷子)의 성(誠)에 항복하고 말았다. 鬼 心 誠 끝.
(근데, 과연 내가 항복한게 맞을까? 확인 사살했더니.. 일어나네..! 하수가 아니라 좀비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