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순백불비(純白不備)하면 신생부정(神生不定)이라고 했습니다. 신생(神生)은 생명력이란 뜻입니다. 생명력이되 정신적 측면에 방점이 있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력이 불안해진다(不定)는 것입니다. 정처(定處)를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생명력이 정처를 얻지 못하면 도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道之所不載). 이것이 장자의 반기계론입니다.
그 한 사람의 노동을 로봇이 수행한다면 그리고 그 로봇이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정지됩니다. 이것은 장자의 문제의식과 다른 것이지만 생산 효율성이 높아질수록 생산에 참여하는 고용 소득의 분배만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기계란 한마디로 과거 노동입니다. 갑자기 과거 노동이라니요. 기계는 과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기계가 하는 역할은 과거 노동을 생산물에 감가상각비의 형태로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계는 과거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노동이 여기에 투입됨으로써 현재의 노동을 줄여 주는 것입니다. 기계란 그런 것입니다.
요컨대 기계가 가치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기계에 대한 환상과 신화는 시장논리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과거 노동을 재투입하고 현재의 가치를 재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기계, 기술입니다. 하지만 개별 기업 단위로 볼 땐 그것이 곧 이윤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가치 창출로 인식됩니다.
가치를 ‘효용’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효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이 못 됩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가치의 크기를 투하노동시간으로 정의합니다. 그것도 개별 생산자의 투하노동시간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기술과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한 노동시간입니다. ‘사필노(社必勞)입니다. 그 사회의 평균치입니다. 시장가격은 사필노를 기준으로 성립됩니다. 그러나 현재는 세계화 시대이기 때문에 한 국가의 사필노가 아니라 세계적 기준이 나타납니다. 세계적 필요노동시간 ’세필노(世必勞)라고 할 수 있겠네요. 국제적 시장가격이 성립됩니다. 그만큼 치열한 환경입니다. 기계에 대한 신화는 더욱 공고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장자의 기계론은 이처럼 기계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노동과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노동은 생산요소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비효용으로 규정하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을 경제원칙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 때문에 노동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입니다만 사실은 노동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첫 시간에 공부는 달팽이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은 노동합니다. 한 송이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어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뻗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참새인들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은 생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식입니다. 그것을 기계에게 맡겨 놓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계의 효율을 통하여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여가를 즐기게 된다면 그것으로써 사람다움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 경감과 소비 증대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노동 자체를 인간화하고 예술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자기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비와 소유와 패션이 그 사람의 유력한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도시라는 복잡하고 바쁜 공간에서는 지나가는 겉모습만 보입니다. 집, 자동차, 의상 등 명품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교도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표피적이지 않습니다. 1년 365일을 함께 생활합니다. 그 사람의 적나라한 모습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에도 명품족이 있습니다. 관에서 지급하는 죄수복을 그대로 입지 않고 그것을 양재공장에 부탁해서 헤체한 뒤 새로 박음질하고 줄 세워서 다려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로 치면 명품족입니다. 그 명품족을 보는 시선이 사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회에서는 그 명품이 그 사람의 유력한 표지로 공인되지만, 교도소에서는 그것을 보는 시선이 대단히 냉소적입니다. ‘놀고 있네!’, ‘나가면 또 들어오게 생겼다.’ 이것이 일반적 반응입니다. 사람을 알고 나면 의상은 무력해집니다. 우리 시대의 도시미학은 명품과 패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방황이 얼마나 큰 것을 안겨 주는가에 대해서 우리 시대는 무지합니다.
화장, 성형, 의상으로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노동과 삶, 고뇌와 방황에 의해서 경작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장자의 반기계론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에는 도를 실현하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선하지(善下之), 부쟁(不爭)입니다. 물과 같은 진행 경로를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사회 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자>의 경우 그것은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리(理)가 아닌 정(情)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일(合一)과 소요(逍遙)입니다. 이처럼 장자의 자유를 극한까지 밀고 가면 일체의 사회적 가치가 부정되고 일체의 문화적 소산이 무의미해집니다. 장자를 최고의 체제 부정의 사상가, 아나키스트라고 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자가 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경물중생(輕物重生)입니다. 물(物)은 가볍고 생명이 중합니다.
식민지 세월 그리고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소위 장자적 풍모를 과시했던 시인 묵객들이 많았습니다. 기행(奇行)과 주사(酒邪)의 주인공들입니다. 사회적 규범에 얽매이는 일 없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기개를 보였습니다. 장자 사상을 그렇게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를 부정하는 부정의 철학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장자 사상의 일단입니다만 탈정이라기보다는 좌절과 자학으로 기운 것이었습니다.
후기 근대사회는 그 포섭 기제가 어느 때보다 막강하고 정교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규제가 아니라 삶의 정서 자체를 포획함으로써 갇혀 있다는 자각마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생각에 갇혀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들을 판단합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잇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구의 산모 여지인(厲之人)의 몸짓은 그 통절함이 과연 자기 성찰의 정점입니다.
적절한 중장기(中長期) 정책과 강약, 단속(斷續)의 온-오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3S(slow down, small down, soft down)의 연착륙 과정이며 과도한 대외 의존 경제 구조를 조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어 오프’와 ‘3S’가 노자의 귀(歸)라 할 수 있고, 지속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는 것이 장자의 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