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 사상은 유가가 대표하고 있듯이 인본(人本), 문화(文化), 성장(成長) 패러다임입니다. 인류 문명사의 보편적 구조입니다. 인간의 적극적인 실천[爲]을 통해 문화를 만들어 내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 진보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노장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자연 중심입니다. 위(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를 주장합니다 문화가 아니라 반문화(反文化)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진(進)이 아니라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귀(歸)입니다.
진(進)과 귀(歸)라는 두 개의 사상이 서로 견제하고 있는 것이 중국 사상의 기본 구조라고 합니다. 서양 사상의 경우 이러한 두 개의 대립 항(項)은 각각 과학과 종교입니다. 과학은 진리를, 종교는 선(善)을 지향합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는 두 개의 축이 그렇습니다.
교재에 있는 '삽십폭공일공(三十輻共一轂)'은 수레의 바퀴살이 30개가 한 개의 홈통[輻]에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곡(轂)이라는 것이 허브(hub), 홈통입니다. 이 홈통이 비어 있어서 축을 끼울 수 있고 그래서 수레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노자의 사상의 핵심이 '무유론(無有論)'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은 무(無)와 유(有)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질서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 무(無)의 최대치가 바로 자연입니다.
무와 유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유와 무를 통일시킴으로써 우리의 왜소한 사유를 확장합니다. 우리의 강의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세계 인식의 확장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는 무가 개념화되고 가시화된 것입니다.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우리말의 '없다'는 '업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있으면 일단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유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아기들과 하는 '까꿍' 놀이가 그것입니다. 없던 엄마가 갑자기 까꿍! 하고 문 뒤에서 나타납니다. 아기는 '없다'와 '있다'를 함께 생각합니다. 숨바꼭질 놀이도 같은 것입니다. 무유론이 노자 철학의 핵심인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노자 사상이 발 딛고 있는 최대의 기반이 바로 자연입니다. 자연이 최대 범주라는 것은 인간이 바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로서 완성됩니다. 유가 사상의 진(進)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인위(人爲) 궁극적 귀착지가 자연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노자의 자연은 대상으로서의 자연(nature)이 아닙니다. <노자> 영역본에서 자연을 'self-so'라고 번역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최고의 질서, 가장 근본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가장 안정적 질서가 바로 자연입니다. 노자 철학을 압축하여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人法地), 땅은 하늘을 본받고(地法天),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天法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지인의 법칙인 도(道)가 본받는 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입니다. 최고의 궁극적 질서가 자연입니다. 노자 철학의 근본은 궁극적 질서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그것에 발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층 건물에서 내려와 땅 위에 발 딛고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강물이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뉘어 흘러오다가 강물이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뉘어 흘러오다가 두물머리에서 합강(合江)하고 다시 서울을 환포(環抱)하면서 서해로 흘러갑니다. 이러한 강물의 곡류는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진 가장 안정적인 질서입니다. 곳곳에 댐을 막아 강물을 돌려놓지만 홍수가 한차례 지나가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영위하는 규제와 문화도 결국은 자연이라는 궁극적 질서로 복귀합니다. 그것이 도법자연입니다. 가장 안정적인(stable) 시스템이 자연입니다. 노자는 분명히 4대강 사업을 반대할 것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가하는 일체의 인위(人爲)는 자연이라는 질서로 보면 ‘거짓’입니다. 인(人)과 위(爲)를 합하면 거짓 위(僞)가 됩니다. 인위는 참다운 것이 아니고 최고가 아닙니다.
상대적이라 함은 그것이 인위의 소산이라는 뜻입니다. 자연은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주의 인식론에 이어서 실천론을 전개합니다. 상대주의 인식론과 실천론을 ‘시이(是以) 즉 ’그러므로‘라는 인과관계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인식과 실천은 함꼐 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위무위(爲無爲) 무불치(無不治), 이것은 무위를 강조하는 어법입니다. 무위로써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으로써 무불치(無不治)를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무불치’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무불치는 글자 그대로 ‘불치(不治)가 없다(無)’는 뜻입니다. ‘못 다스릴 것이(不治) 없다.’ 무위로써 다스리면 다스리지 못할 일이 없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위무위 무불치’는 노자 사상이 피세(避世) 은둔 사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세(改世) 사상이라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고 ‘무불치’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치(治)는 평화를 의미하고 불치(不治)는 ‘혼란’ ‘난세’를 뜻합니다. 따라서 무불치는 혼란과 난세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란 뜻으로도 읽습니다. 무위로써 실천해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와 같은 뜻입니다.
이처럼 <노자>의 무(無)는 노자 사상의 근본입니다. 난세에는 도가를 읽고 치세에는 유가를 읽는 까닭이 무(無)가 곧 세상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법가에 의해서 통일됩니다. 그러나 진(秦)나라는 단명합니다. 그리고 한(漢)나라가 천하의 주인이 되고 법가를 대신해서 유가가 지배 사상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유가가 관학이 되지만 내면에서는 여전히 법가 사상이 뼈대가 되고 있습니다. 외유내법(外儒內法)입니다. 겉으로는 유가를 표방하지만 내면은 법가라는 뜻입니다. 유가는 법가에 비해 유화적(宥和的) 지배 방식을 표방합니다. 법가는 군주 권력을 중심에 두는 사상입니다. 이에 비해 유가는 예(禮), 악(樂), 인(仁)과 같은 유화적인 지배 기제를 통해서 법가의 적나라한 권력 의지를 은폐합니다. 그러나 국가란 본질에 있어서 폭력이며 잠재적인 전쟁 기구입니다. 국가는 계급 지배가 본질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역사에는 반드시 전쟁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외부와의 전쟁이든 내부 전쟁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억압과 지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민중 정서는 반국가적입니다. 노자 사상은 그러한 민중 정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노장의 반문화 사상과 무위사상은 모든 시대, 모든 국가의 저변에 깔려 있는 민초들의 사상적 기조가 됩니다.
의외로 여러분의 가까운 곳에 그리고 가까운 사람 중에 ‘노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노자를 찾아내는 안목이 없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노자를 닮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고전은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곳입니다. 실제와 상상력, 현실과 이상이 넘나드는 역동적 공간이어야 합니다. 유가의 발전 사관과 진(進)의 신념도 후기 근대사회의 자본축적 양식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새롭게 읽혀야 합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꾸준히 탄생합니다.
노자가 강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수선리만물(水善利萬物)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이 곧 생명입니다. 둘째 부쟁(不爭)입니다.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투지 않습니다.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흐르는 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 가로막히면 돌아가고 큰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지나갑니다.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난 다음 뒷물을 기다려 앞으로 나아갑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습니다. 쟁(爭)의 뜻은 전(戰)과 다릅니다. 전(戰)은 한일 축구 대항전처럼 적과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쟁(爭)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의미합니다. 전(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쟁(爭)은 방법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물이 흘러가는 모양이 부쟁(不爭)의 전형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위무위(爲無爲)가 바로 부쟁입니다. 셋째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떄무에 상선(上善)입니다. 싫어하는 곳이란 낮은 곳, 소외된 곳입니다. 물은 높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물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왕을 이긴다는 민초의 정치학입니다. 민초에게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물은 궁극적으로는 ‘바다’가 됩니다. 바다는 가장 큰 물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위력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물은 ‘하방연대(下方連帶)의 교훈입니다.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연대는 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뿐입니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