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 13장 사일이와 공일이

by Rx


달리기 경주 때문은 아니지만 실천이 부재한 감옥 상황에서 독서만으로 자기의 생각을 키워 나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그 이후부터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부지런히 듣게 됩니다. 아마 수형 생활 20년 동안 책 읽는 시간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이를테면 그 사람이 실제로 겪은 과거의 실천입니다. 그것을 나의 목발로 삼아서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무리한 통일이고 불균형일 수밖에 없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습니다. 독서-독서-독서는 생각이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부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생각이 현실에서 유리되는 경우를 공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단지 이론의 짝으로서의 실천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사택에서 태어나서 줄곧 학교에서, 책에서, 교실에서 생각을 키워 왔던 나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험한 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그 참혹한 실패의 경험들은 육중한 무게로 나의 사유를 견인했습니다. 발밑의 땅을 잃고 공중으로 부양하던 생각들이 이제느 발목이 빠질 정도의 진흙 위에 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 가리라고 예상했지만 반대였습니다. 생다리가 목발을 배우게 됩니다. 그만큼 목발은 무겁고 강렬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피가 돌고 감각이 살아났습니다. 제페토 할아버지의 피노키오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한 발 걸음과 목발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변화에 관한 자기 개조의 담론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갇혀 있던 근대적 인식틀은 완고했습니다. 재소자는 기본적으로 룸펜 프로라는 선입관을 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료 재소들을 대상화하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죄명, 형기, 학력, 결손가정(?)…… 하나하나 분석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친절하게 지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상대방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기들을 그런 관점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다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나는 사회에서 자기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왕따는 내가 변화함으로써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변화한다는 것이 바로 동료 재소들의 경험을 목발로 삼아 서툰 걸음을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참담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인생사가 나를 적시고 지나갑니다.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부모 만나서 그런 인생을 겪어왔다면 지금 똑같은 죄명과 형기를 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다리가 목발을 닮아 가는 과정이며 나 자신의 변화이기도 했습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억지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고, 사회의 최 말단에 밀려나 자기의 처지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는 나를 두고도 “사람은 좋은 사상이 나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먹물들은 연설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점을 극히 경계했습니다. 우선 그 사람의 인생사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 사람의 생각은 그가 살아온 삶의 역사적(?)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없듯이 그 사람의 생각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의 생각 역시 옳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수많은 삶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승인하고 존중하는 정서를 키워 가게 됩니다. 이 과정이 서서히 왕따를 벗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었습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은 참으로 먼 여정이었습니다. 이 여정은 나 자신의 변화였고 그만큼 나에게 성취감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가슴까지의 여행이 최고점이고 종착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톨레랑스’, 프랑스의 자부심이며 근대사회가 도달한 최고의 윤리성이 바로 관용이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도 이러한 정서에 도달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이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목발이 되어 먼길을 함께 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강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회도 오래지않아 문지기 시작합니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자면 ‘가슴’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멀고 먼 여정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바로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가슴’이 공감과 애정이라면 ‘발’은 변화입니다. 삶의 현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 품성을 키워 가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感謝)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목주의입니다. 들뤼즈, 가타리Félix Guattari의 노마디즘입니다. 이 유목주의가 바로 탈근대의 철학적 주제임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다즘은 아닙니다. 나는 문도득의 집 그림에서부터 또 하나의 먼 길을 시작합니다. 자기 개조의 길입니다. 우선 기술을 배우고 일하는 품성을 키워 나갑니다.


그러나 <연금술사>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손에 넣게 되는 금이 아닙니다. 그 긴 유랑의 매 순간이 바로 황금의 시간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변화와 개조 역시 그 과정 자체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내가 기술자에 마음을 두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콤플렉스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자보다는 일상적 언어와

정서를 바꾸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왕따를 벗어나고, 말투가 바뀌고, 인간적인 신뢰를 얻게 되기까지 생각하면 참 많은 사건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10년쯤 지난 후에는 비교적 자연스럽고 편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례를 들어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자기 개조는 자기라는 개인 단위의 변화가 아닙니다. 개인의 변화도 여러 가지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적 신뢰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변화를 ‘가슴’이라고 한다면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을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교도소의 인간관계란 금전적 관계도 아니고 명령과 복종의 권력 관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간적 바탕 위에서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예술입니다. 너무 잘나서도 안 된고, 그렇다고 못나서도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인간성이 일상생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싸움 얘기는 하나도 안 썼지만, 붙잡고 싸우기도 합니다. 이기기도 하고 지기기도 하지만 이기는 경우 8대 2의 큰 격차로 이기는 완승(完勝)은 안됩니다. 6대 4 정도의 신승(辛勝)이라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싸울 때는 험한 욕설도 주고받으며 비슷한 수준의 인격적 파탄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 이후에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인간관계란 한마디로 예술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동문고를 운영하는 일이 어느 정도는 인간적 신뢰에 도움이 되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못 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시혜(施惠)입니다. 시혜를 베푸는 것으로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합니다. 시혜란 한마디로 잘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上限)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변화에 대한 확신이 출소 이후에 흔들리게 됩니다. 출소와 함께 최소한 2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납니다. 대부부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너 조금도 안 변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자위할 것이라고는 자기 개조 하나밖에 없는 나로서는 당혹스러운 칭찬이었습니다. 물론 위로하려는 뜻인 줄 모르지 않습니다. 출소에 이어 곧바로 대학 강단에 섰기 떄문에 외견상 옛날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친구들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세월도 많이 흘렀고 외모도 변했지만 인간적 자질이라든가 생각하는 틀 이런 것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왈칵 겁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불안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전쟁에 나간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걸 의미한다. 어머니가 돌아오는 아들을 언덕에서 기다리는 것만큼 전승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있는가? 나를 직시하며 이야기했습니다.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들킨 것이지요. 전승(戰勝)에 대한 나의 관념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를 그는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기획자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마라.’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실감했던 아픈 기억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한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골목 자체가 특수한 골목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특수한 개인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 발 걸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발로 걸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는 ‘두발 걸음’을 얻으려는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발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 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은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든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 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마흔 살이 넘어서도 은퇴할 수 없어서 선수 겸 감독으로 여전히 현역이었습니다. 내가 특별히 실력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다투기 일쑤일 뿐 아니라 패스가 안 됩니다. 고집들이 세고 하나같이 개인플레이입니다.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 내 역할입니다. 심지어는 스코어 관리까지 해야합니다. 빠다 10개 걸어 놓고 하는 시헙을 내리 계속 이기거나 지게 되면 운동장이 험악해집니다. 그래서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져 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걸 표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놀랐습니다. 그 친구 정말 영웅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첫 번 빳다가 10대 맞으면 줄줄이 10대 맞습니다. 첫 번 빳다의 임무는 빳다 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엎드려! 안 엎드려요. 내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계속 늘어놓습니다. 발로 채이고 쥐어박히고 얻어터지면서도 고분고분 엎드리지 않습니다. 빳다 맞기보다 그게 더 괴롭습니다.


때리는 사람을 한없이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세 대 때리는 데 거의 10분 걸렸습니다. 그런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투쟁 덕분에 세 대로 낙착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순순히 빨리 빨리 맞았브니다. 세 대씩 줄줄이 맞고는 전원 벌방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 또 감옥 간 셈입니다. 그런데 축구하다 잡혀서 맞고 벌방에 간 것이 빠다 따서 국에 넣은 공로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교도소는 목욕탕 수준의 적라나한 공간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어항 속의 붕어처럼 다 읽힙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의 경우에도 그것이 진정한 변화가 아니면 승인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의 진정성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 금방 간파됩니다. 교도소 표현으로 ‘맥기(鍍金) 벗겨진다’고 합니다‘.


노력이라기보다는 각성(覺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기수들 중에는 무기수가 책 봐서 뭐할 거냐고 핀잔한 사람도 있습니다. 단기수들은 벽에다가 달력을 그려 놓고, 하루 지나가면 사선을 그어서 지워 갑니다. 하루하루 지워 나가다가 그것도 지루하면 오전이 지나면 사선 하나 긋고 오후가 지나면 사선을 또 하나 그어서 X자로 지워 갑니다. 만기 날짜만 기다립니다. 하루하루는 지워 가야 할 나날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기가 없는 무기수의 경우는 그 하루하루가 무언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가 깨달음으로 채워지고 자기 자신이 변화해 가야 그 긴 세월을 견딥니다. 다음 시간에 그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만, 고통 그 자체가 연겨 주는 엄청난 각성이 있습니다. 축구선수, 이동문고, 떡신자도 그런대로 고통을 견디게 해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대의 은의(恩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쌓아 가는 작은 깨달음의 누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인내와 변화의 저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자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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