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한테 받으면 꿀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러닝셔츠를 받으면 그 좁은 밤잠 자리에서 자기 몸도 맘대로 못하고 운신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서 여기까지 와서 또다시 밀린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도 더 비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러닝셔츠 없어도, 치약 없어도 떳떳한 게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은 나누지 않습니다. 자본은 본질적으로 자기 증식하는 가치입니다. 자본축적이 자본의 운동법칙입니다.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력의 요소 소득만으로는 유효수요가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나눔의 문제는 인정이나 동정의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후기 근대사회의 구조적 문제로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밀리고 밀려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현실에서 공염불 같은 기도였다. 미치지 않고(!?...태생이 똘... 일수도;;;;) 죽지 않고 살아냈던 나의 힘은 자존심이었다. 쥐뿔도 없는 깡다구 하나로 자기파괴와 자기보존의 경계에서 늘 시소를 탔다.
나는 신영복 선생님 책을 읽으면서 거친 내 마음을 쓰다듬게 된다. 모든게 내 탓이요, 내 못난 탓이요, 내 원죄요. 라는 자업자득 저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여지껏 살아온 심층적 정서와 자동반사적인 심리 운동을 한번에 탈주하긴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나도 선생님처럼 변해보려고 한다. 변방의 목소리로 최소한 나 개인의 삶의 불행을 해체하고 재구성해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나의 불행이 신세타령 수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접속된 관점으로 재조정하고 나의 하루는 새 봄을 맞아 경작될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는 본 적 없는 행복 괴담까지도 해체하고 싶다. 나 같은 낙오자, 아웃사이더에겐 "행복하세요, 잘 지내' 라는 말조차 때론 무거운 당부가 되기에 나는 불행이 더 가까운 그것이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불행이 내 인생 가장 큰 선물이길 바란다. 까도 까도 또 나오는 마트료시카 러시아 인형 처럼. 똑같지만 차이가 분명한 디테일있는 인생을 만들고 싶다. 차이는 절대 불량품이 아니라 나만의 개성임을 믿어볼 요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행복하시길' 바란다. 이제 나는 당신들을 보면서 '왜 나만 불행해'라고 덜 말할 수 있고, 당신들이 지탱하는 무게에 공연히 내 무게를 짐 지우고 싶지 않은 자존심 때문이다. 자~부담 갖지마시고 맘껏! 잘들 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