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담론> 21장 상품과 자본

앓아 알아?!

by Rx


경제학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사용가치가 아닙니다. 쌀의 가치는 일용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의 비율이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l는 그 자체의 소재 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 나타나는 상대적 가치입니다.



등가물은 그 물건의 속성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교환가치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이어야 할 인간관계 마저도 화폐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천민적 사고입니다.



아름다움은 ‘앎’입니다. 숙지성(熟知性)이 그 본질입니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상품미학의 경우 더구나 패션은 ‘모름다움’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미적 정서의 역전입니다.



생명 그 자체의 뒷받침하는 안정감, 그것이 미의 본질이고 아름다움의 내용입니다.



상품사회는 이처럼 상품-화폐 구조 속에 우리를 가둠으로써 인간적 정체성을 소멸시킬 뿐 아니라 우리들의 미적 정서 그 자체를 역전 시킵니다. 그리고 변화 그 자체를 이미지화함으로서 현실의 개혁과 전정한 변화의 열정을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이 되어 건너오는 경우 그것은 어떻게 대체될 방법이 없습니다. 기쁨과 아픔의 근원은 관계입니다.



고뇌와 벙황과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식합니다.



자기가 생산하고 자기가 점유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소비와 소유가 인정됩니다



자기의 존재성이 배타적으로 과도하게 추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본권려 아래에서 그림자를 추월해야 하는 가망 없는 질주를 하고 있는 피로사회의 자기 착취자가 앓는 병이 우울증입니다. 근대사회가 질병을 퇴치했다는 주장이 무색해집니다. 자본축적이 강요하는 자기 착취는 인간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파괴합니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성취감과 자부심 역시 모순 구조입니다. 성취감과 함께 열패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부심과 함께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우울한 자학적 존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기 착취자이기 떄문입니다.



부패 문제는 흔히 윤리적 문제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부패이 근본 원인은 경쟁입니다. 사활이 걸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직한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근과 채찍 사이에서 벌이는 사활적 질주에서 못할 짓이 없습니다. 부패는 치열한 자본축적 과정의 필연적 사회현상입니다. 그것을 윤리문제로 분리하여 거론하는 것 자체가 축적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논리입니다.



경쟁은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지구상의 생물을 동물, 식물, 미생물로 분류한다면, 생산자는 식물밖에 없습니다. 동물은 철저한 소비자일 뿐입니다. 미생물은 생산이든 소비든 그것을 매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생산이란 이름으로 자연 자원과 인간 노동을 사용한 다음 자연과 인간을 원상태로 돌려놓지 않습니다. 가져왔으되 도로 돌려놓지 않은 부분 즉 외화(外化)된 부분을 생산이라고 합니다. 가치 창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오염입니다.



인간을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동력이 사회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을 자살률 통계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생산의 이면 즉 생산에 소요되는 물질적 낭비에 생각이 미치면 이것을 생산력 증대라 할 수는 없습니다. 공해를 유발하는 사실을 건설하고 다시 공해 처리 시설을 건설하고 병원을 짓는 일련의 건설 과정이 모두 생산력의 증가로 나타나고 GDP의 증가로 계산됩니다.



자본축적 과정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생산은 재생산 과정이며 재생산은 ㅍ필연적으로 확대재생산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생산물이 팔리지 않더라도 유통업자에게 생산물을 인계하고 신용자금을 받아서 생산과정에 들어갑니다. 치열한 경쟁 상태에 있기 때문에 확대재생산해야 하고 자본의 회전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불균형이 누적됩니다. 이 불균형의 누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파열하는 것이 공황(恐慌)입니다



파괴적 균형 회복입니다. 생산과 소비 간의 불균형도 조정됩니다. 열위(劣位) 자본이 탈락하고 독점화가 진행됩니다.



산업자본이 자연과 노동을 수탈하는 것이라면 금융자본은 큰 자본이 적은 자본을 수탈하는 파괴적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문학적 성찰이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구조를 조감할 수 있는 드높은 관점을 열어 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앎에서 나온 말이라니 외적인 형태나 각선의 미를 침 흘리며 욕망하는 자들은 꼭 죄인이 된 듯하다. 모두가 선생님 같지는 않다구요!ㅋ 우리의 말초적 감각은 직관적,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욕망한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냐는 못한다(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사람과 첫 만남에서 우리는 자동 반사적으로 견적을 낸다. 이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나보다 위다, 아래다. 솔직히 다 그런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외모, 재산, 학력, 직업, 정치성향, 종교 등 으로 순식간에 부지불식간에 파악하고 판단까지 마친다. 우리의 무지는 무례하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나아가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기 때문에 겉치장을 하고 명함을 주고 받고 스스로를 내세우기도 한다. 요즘 패션 뷰티 키워드는 '꾸안꾸'다. 꾸민듯 꾸미지 않은 듯. 이 세련된 자기 표현은 패션 뷰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어필을 꾸안꾸로 할 때 겸양이 되는 요즘이다. 개성과 기질에 따라 미친 소리처럼 자기 자랑을 왕왕 하거나 쭈굴이 마냥 의기소침하게 쭈뼛거리는 거리면 재수없고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나는 한 때 내가 갖지 못하는 명품, 라이프 스타일 이런 것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견지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은근히 조롱하는 마음을 가졌다. '인간이 명품이 되야지' 하면서 근본주의자 같은 생각에 빠져 자위, 독존했다. 그러나 내 인생에도 명품백 하나 쯤은 가질 만한 기회가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우습게도 명품 패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역시 모든 곳에는 다 역사와 입장, 철학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명품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그 가격이 내포하고 있는 프리미엄에 대한 가치를 불편한 마음으로 전적으로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움은 각자 느끼는대로 느끼는 것이지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처럼 진선미라는 최고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생기는 것도 아니고 도덕 윤리 철학 사상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학에 대해 모르지만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한다면 '안다는 것' 보다 '앓아봤냐'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천박한 치장 속에도 앓음다움은 있다. 물론 알아보기란 쉽지 않다. 결국 알아보는 것이 아름다움인가?



아름다움도 (천민)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유통 과정에서 향유되고 있다. 선생님의 탈주, 탈문맥, 탈정의 개념이 아름다움까지 포괄하여 넘어서야 할 과제로 인식하여 실현된다면, 앓음다움의 알음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는 나의 명제가 증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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