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의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아 삶을 이어붙이고
누군가는 작품을 남겨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하며
또 누군가는 이름 한 줄을 역사에 새기기 위해 성과를 쌓아간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을 이어붙여 줄 아이도 없고, 나만의 세계를 세울 만한 재능도 부족하며,
역사에 이름을 새길 만한 성과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글 몇 줄을 적어낼 수는 있었다.
그래서 결국 글을 선택했다.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니, 그것이 결국 감정을 벗겨내는 작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평소 감정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늘 무언가를 담백하게 설명하고 분석하는 글을 써왔기에
형용사나 부사, 비유를 사용해야 할 순간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감정들에게 하나씩 질문을 던지며 문장을 완성해 나간다.
내가 느낀 건 정확히 어떤 감정인가?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어떤 비유가 이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낼까?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내 안에 덩어리처럼 남아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고 하나둘 껍질을 벗는 느낌이 든다.
에밀 졸라가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대의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문장은 사회를 흔들고 시대를 움직이고 때로는 한 인간의 삶을 구한다.
그런 글들을 읽고 있으면 나는 차마 고개를 들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쓰는 글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고작 나 자신의 존재했다는 흔적 하나를 남기기 위한 기록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부끄러움은 나를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글이 지닌 한계를 또렷하게 인정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나는 거대한 진실을 고발할 힘은 없지만
나라는 한 인간의 조그만 진실만큼은 정직하게 적어내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작은 진실을 붙잡아두는 과정 자체가 내 삶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오늘도 쓰면서 스스로에게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