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 하게도 아플때,
힘들때, 기억이 잘 나지않을때에도
가장 보고싶었던 사람은
내 엄마.
엄마는 늘 무심했지만
난 늘 엄마를 바라보는 딸이었다,
엄마는 날, 사랑해서 놓은게 아니지만,
꼭 날 사랑한다는 것처럼
이게 본인의 표현방식이라
말했다.
아니다, 달랐다,
그녀는 다른 엄마와 다르단걸 30년후에 알았다.
물론 날 사랑했을거다. 날 10개월 품었으니,
그러나 내가 “대학에 붙었다”라는 소식을 전했을때
“그렇구나, 고생했네”라는 단백한 말로 하루를 마쳤다.
“엄마는 왜 뭐먹고 싶냐거나, 너무 장하다라 하지않아?”
라 물었을때,
“이제 물어볼랬지”라며 답했고
내가 먹고 싶다던 갈비를 난 그제야 얻어먹을 수 있었다.
맞다, 그녀의 사랑 방식은 느끼기 어려웠다.
“엄마 나 배갸 너뮤아파” 라 할때도
“밖에 이모들 와있으니 징징거리지마”라고
자주 장염을 겪던 나를 성가시게 여겼다.
“뭐든 스스로 해내야 하는 딸”
이어야 해서 그랬을까
엄마는 늘 내가 “얼마를 버는지” 궁금해 했다.
일이 어떤지 힘들지 않는지 보다는
”그래서 얼마받아“가 엄마의 주 관심사였다.
폭력을 휘두르려했던 회사에서
그만둔다 했을때에도
무슨일이 있냐가 아니라
“난 네게 줄 돈이 없다”였다
그래도 난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했다, 엄마의 어릴적을 엄마의 다섯살을
꼬옥 사랑했다.
시간이 지나니 점점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들이 없어졌다.
엄마랑 말하고 싶었다.
엄마는 매일 주식창을 들여다 봤다
그래서 나도 주식을 시작해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엄마는 주로 전화하면 일을 한다,
엄마는 늘 바쁘다,
엄마의 말대로 나는
눈칫껏 힘든 이야기는, 힘든 시간에는,
어떤 이야기든 하면 안된다.
그게 눈치라,
내가 눈치다.
사실은 어쩌면 나는
태어나게 해 준 이에게
가장 귀찮은 존재이다.
엄마를 이해한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그녀가 아플때도 있다.
그래서 엄마를 지금도
온전히 아파하기 힘들다.
“힘든게 다가 아니라는”
잊혀지지 않는 비수도
그 조차도 온전히 밉기 어렵다.
그나마 좀 미운건
살려달라 여러번 외칠때에도
“네 몸은 네가 챙겨”라는 그녀의 말과 태도
엄마가 대신 아파 줄 수 없다는 말
대학병원에는 오지도 않았거니와
입원 중의 전화에
이사로 바쁘니 나중에 전화할게라며
다시오지 않는 전화를 한참 기다릴때의 내가 밟혀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자식앞에서
맥주와 치킨을 뜯던 모습.
그정도. 는 안다 미워해도 된다고,
어떤 일은 가슴에 꼬옥 남는다
드라마 다시보기처럼
재재생이 가능하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나 아프기 싫어,
너무 아파서 하루가 48시간 같아,
서울에 당장 와줘, 당장 데리고 내려가줘
라고 징징대라도 볼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