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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y Soul Jul 05. 2024

11. 런던에서 만난 조성진

위그모어 홀과 BBC Proms

런던에서 지내면서 손흥민 선수의 경기를 직관한 것만큼이나 소중한 경험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를 직접 들어 본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조성진 공연 티켓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런던에서 나는 무려 두 번이나 그의 공연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큼 런던에서 지내는 게 만족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사실 나보다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내 아내인데, 그래서인지 조성진을 본 내 아내의 반응을 보니 내가 손흥민을 봤을 때 느꼈던 감동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았다.


위그모어 홀(Wigmore hall)
위그모어 홀(Wigmore hall)

우리가 처음 조성진의 공연을 본 것은 런던을 대표하는 위그모어 홀(Wigmore hall)에서였는데, 위그모어 홀은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말리본(Marylebone)에 위치한 작은 실내악 음악 홀이었다. 

연주를 마친 조성진과 솔타니

500석 정도의 작은 규모와는 다르게 120년이 넘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위그모어 홀은 전 세계를 대표하는 클래식 음악가들이 찾는 최고의 클래식 공연장으로 유명한데, 그런 위그모어 홀에서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경험인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나 역시 (한국인이라면 다들 그렇듯이) 조성진은 잘 알고 있었는데, 셀럽으로서의 유명세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연주곡 '녹턴'이나 '달빛'만큼은 한동안 음원으로 즐겨들을 정도로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공연은 첼리스트 솔타니와의 협연이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그의 유명곡들을 따로 듣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조성진의 공연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감동이었다. 그리고 관객들의 숨소리까지도 다 들릴 것 같은 이 작은 홀에서 그의 연주를 듣다 보니 실제로 나도 모르게 자꾸 숨을 참게 돼서, 자연스레 조성진의 연주에 숨이 멎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BBC 프롬스(Proms)

위그모어 홀 공연 외에 그의 또 다른 공연은 런던을 대표하는 클래식 축제 'BBC 프롬스(Proms)'에서 펼쳐졌다. 참고로 프롬스는 1895년 런던 시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 공연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한 목표로 시작된 축제로 1927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프롬스를 BBC가 인수해 지금 모습의 BBC 프롬스가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BBC 프롬스는 해마다 여름휴가 시즌에 BBC 교향악단(BBC Symphony Orchestra)을 중심으로 영국과 해외의 최고 음악인들이 참여해 세계 최고 수준의 무대를 선보이고, 올해도 역시 7월부터 약 두 달간 런던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진행된다. (이 기간에 런던 여행을 오시는 분들은 미리 티켓 구매를 해서 BBC 프롬스를 경험해보시길 추천한다. 올해는 조성진은 물론이고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참여한다고 한다)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매일 저녁 유명 음악인들이 돌아가며 공연을 하는데, 조성진은 8월 16일에 공연을 했고 나는 세 달 전쯤 그 공연의 2층 좌석을 구매할 수 있었다. 워낙 공연장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뒤늦게 알아봤는데도 공식 사이트에서 쉽게 표를 구매할 수 있었고 내가 표를 쉽게 구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표가 10만 원도 안 되는 가격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BBC 프롬스가 '시민'들을 위한 클래식 페스티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한국에서 공영방송 KBS의 수신료와 관련해서 말들이 많은데, BBC의 이러한 사회적 역할은 KBS에서도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성진의 공연을 보면서 나는 분위기를 압도하면서도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그의 퍼포먼스에 연신 박수를 쳤고 무엇보다 그가 앵콜곡으로 선보인 '녹턴'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날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BBC 프롬스의 분위기였다. 축제명인 ‘프롬스(Proms)’는 ‘프롬나드 콘서트(Promenade concerts)’의 줄임말로 청중들이 바닥에 앉거나 자리에서 일어서서 편안하게 음악을 듣는 콘서트 형식을 말한다고 하는데, 그 말처럼 1층 가운데는 스탠딩 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스탠딩 석 관객들은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서서 연주를 들었다. 여느 대중가수 콘서트처럼 캐주얼한 복장으로 공연장을 찾아 스탠딩 석에 서서 아티스트의 훌륭한 연주에 환호를 보내고 박수를 치는 관객들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웠고 보기 좋았다. 그러다 보니 이 날 클래식 공연장에는 유독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였는데 내 옆 자리에도 대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남성들이 청바지와 티셔츠에 백팩을 메고 와서는 그 나이 또래 친구들처럼 신나게 떠들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하나같이 집중해서 클래식 연주를 듣던 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클래식 음악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BBC Proms, 로얄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

클래식을 보러 갈 때는 꼭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BBC 프롬스는 내가 가진 클래식 공연에 대한 작은 부담감마저도 사라지게 해 주었다. BBC 프롬스는 내가 본 가장 캐주얼하고 가장 자유로웠던 클래식 공연이자, 가장 부담 없었던 가격의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공연이라면 조성진이 아니라도 또 오고 싶지 않을까. 런던에서의 여러 경험을 통해 짧은 기간 내가 참 많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공연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평생 런던에 산다면, 나라는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재미있고 행복한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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