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 다른 도시, 다른 사람들과 사는 법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6개월 정도 런던에서 지내면서 느낀 것들이 정말 많았는데, 좋았던 순간만큼 힘들고 스트레스받았던 순간들도 많았다. 가장 부담이 된 것은 역시 '돈'이었는데, 내가 회사에서 글로벌 트레이닝을 목적으로 1년
휴직의 기회를 얻기는 했지만 말이 글로벌 트레이닝이지 사실 나는 회사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 없는 무급 휴직자였다. 누군가는 그런 기회를 갖는 것이 어디냐고 말하기도 했는데, 나도 처음에는 그런 기회가 좋았다. 하지만 런던에 살면서 마주한 미친 물가와 생활비에 금방 현타가 오더니 줄어드는 잔고를 보면서는 과연 휴직이 잘한 결정인가 매일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또 간만에 하는 영어는 왜 이렇게 안 늘고, 학원에는 왜 이렇게 어린 친구들만 가득한지 이런 모든 것들이 나에겐 휴직을 후회하게 만드는 핑곗거리, 걱정거리가 되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되지도 않는 영어를 배우러 런던에 왔나?' 부끄럽지만, 이것이 40살도 안 된 내가 런던에서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런던까지 오게 된 데에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사실 나는 ‘글로벌’에 대한 관심이 딱히 없는 사람이었다. 요즘 케이팝과 같은 한류 덕에 프로듀서들도 글로벌 진출에 대한 기회가 커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방송 프로듀서들에게 글로벌은 뭔가 추상적인 이야기고 우선 한국에서 히트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업계가 말하는 사회적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런던까지 오게 된 것은 회사에서 거둔 작은 성과 덕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외국 생활을 오래 했는데, 일정기간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홍콩에서 사회생활을 했다. 그런 아내와 같이 살면서 나와는 참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중 특히 다르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직장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직장에 대해 생각을 하면, 나는 당연히 한국, 그것도 서울 안에 위치한 어떠한 직장을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방송국 프로듀서를 꿈꿨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생각한 나의 직장은 한국의 방송국들이 모여있는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안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본인이 생각하는 직장에 대한 지역적인 한계가 없었다. 런던이든, 파리든, 홍콩이든, 어디든 그녀의 직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만 너무 멀게 느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참 부러웠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내 아내처럼 국경을 제한하지 않는 꿈을 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내를 통해 나도 언제까지 내 시야를 한국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이렇게 휴직을 하고 런던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물론 결혼 생활 내내 해외 생활을 같이 한 번 해보자는 아내의 끊임없는 바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의 탈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휴직 동기와는 별개로 나에겐 휴직기간 이루기로 마음 먹은 특별한 목적은 따로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언가 내 인생을 기쁘게 할 만한 기적적인 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을 뿐 구체적인 목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런던에서의 삶은 나에게 '한국에서의 탈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다 주진 못했다. 그에 반해 탈출에 대한 기회비용은 너무 컸는데 생각보다 나의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갔다. 돈도 돈이지만 한국에서는 나름 피디님 소리 들어가며 인정받던 내가 여기선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아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한류 콘텐츠의 인기를 발판 삼아, 런던의 콘텐츠 회사와의 미팅도 시도해보고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생긴 인맥을 통해 런던의 콘텐츠 제작자와 만남을 갖기도 했지만 막상 회사 타이틀을 떼고 나 개인으로 혼자 부딪혀보니 딱히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없었다. 또한 부족한 나의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마주하면서 글로벌 진출은커녕 외국생활은 어렵겠다는 현실자각만 반복했다. 어차피 외국에서 살지도 못할 텐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내 커리어를 이어가야 하나 바보같이 런던까지 와서도 내 미래 걱정만 계속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건축물, 예쁜 공원, 멋진 풍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때가 많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왔는지 나 스스로 명확하지 않으니 심지어 이 지나가는 시간들이 너무 부담되고 걱정은 늘고 스트레스는 쌓여갔다. 인스타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런던의 사진을 올리고는 와이프와는 다투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이 시간들을 통해 내가 조금씩 변해 갔다는 것이다. 평일에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에 쉬는 날에는 휴식이란 명분으로 방구석에서 유튜브만 보던 그런 내가, 뭐라도 이 시간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자꾸 밖으로 나가 새로운 무언가를 보았다. 매번 다른 미술관, 다른 공원, 다른 백화점, 다른 카페를 돌아다녔다. 이런 상황에는 뭐라도 하나 더 보는 것이 남는 거라는 한국인 관광객의 마음가짐으로 억지로 다른 동네, 다른 도시, 다른 나라까지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다른 문화, 다른 배경, 다른 가치관을 가진 외국인들과 어울리다보니 내가 달라졌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들로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나라는 한 인간이 이 경험들 덕분에 놀랍게도 조금씩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휴직 기간동안 이루고픈 구체적인 목적이 없어서 이 시간을 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인 목적만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면 돈이 없고, 돈이 없으면 굶어 죽는 줄 알았는데 막상 굶어 죽지도 않았을뿐더러 나를 죽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걱정과 스트레스라는 것도 배웠다. 또 내 직업과 커리어는 나의 일부분일 뿐 그것들이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처음에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거나 혹은 의아해하는 외국 사람들을 보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6개월쯤 지나다 보니 점차 우리가 다 다른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편해졌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서 내 삶도 조금씩 편해졌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믿었던 ‘성공’이나 ‘실패’의 기준들이 보다 유연해지면서 누군가와 나를 비교할 필요도, 내가 무언가에 집착할 필요도 덜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친구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나를 걱정하는 횟수도, 친구를 질투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세상은 넓고 정답은 많다
어쩌면 나는 수많은 정답이 있는 이 넓은 세상에서 항상 한 가지 정답만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이라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아주 적은 사람들과만 교류하며 살아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국에서 추구하는 정답 한 가지만을 바랐던 것 같다. 한 가지 정답, 그것은 나 스스로를 속이는 잘못된 세팅 값이다. 한국을 벗어나 세계를 바라보면, 이 세상에는 정답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정답을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는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이곳 런던에서 깨달은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우울한 감정으로 둘러싸여 있던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를 드러낼 수 있게 된 이유, 이것이 그 증거가 아닐까? 프로듀서였지만 나 스스로에게 항상 아쉬웠던 것이, 나에겐 세상에 이야기할 만한 내 콘텐츠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어느샌가 이곳 브런치에 나만의 콘텐츠를 맘껏 생산해내고 있지 않은가? 런던의 아름다운 풍경, 멋진 사람들, 수준 높은 문화 모두 의미 있는 것이지만 런던 사회가 갖는 다양성만큼 중요한 것이 더 있을까 싶다. 이런 내 경험이야말로 멜팅팟(다인종, 다민족, 다문화 도시) 런던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평생 내일을 걱정해 온 나로서는 오늘도 ‘걱정’이라는 관성과 싸우고 있지만 동시에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나는 작지만 세상은 넓고, 나는 부족하지만 정답은 많다. 나는 아직 젊고 시간은 충분하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