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t Perry There | 4.
‘하리 할러의 수기’가 들어 있는 이상한 책,
‘황야의 이리’는 언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느낌만 남은 아득한 시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되고 싶었던 것이 되는 것은 운명의 선택을 받은 몇몇 멋진 사람들뿐이다.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과 시간 그리고 운은 결국은 흘러간다. 흘러가고 나면 그뿐이다. 되돌아갈 수 있는 시간도, 아직 남은 희망도 까마득하다.
우리는 미래 든 과거 든 늘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시간을 그리워하며 산다. 현재를 사는 것은 그토록 힘든 일이다. 내일의 희망이 없어야 오늘과 지금을 산다. 만약 희망이 있어서 산다면 우리가 오늘 최선을 다해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은? 오늘은….’
오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열심히 누리는 것.
그것은 여행자에게 내리는 축복이다.
아쉬웠던 과거와 막막한 미래를 잊고 여행지에서 느끼는 그날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위해 사람들은 지독하게 걷히지 않는 안개 같은 오늘들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이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
책 속의 구절과 함께 페리를 떠올렸다. 그의 눈에는 일상이 주는 피로가 없었다. 페리는 어떤 길이든 마음껏 발걸음을 들였다. 두리번거리지 않고, 조심성 없이.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귤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다.
‘작은 조각상을 보기 위해 몇 번씩이나 포르토를 찾는 인생이란…’
인생이 상처를 주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 가.
‘나는 상처를 입었는가.’
로키가 떠올랐다. 그는 인생이 주는 상처를 좋아가기 위해 전력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림자 같은 어두운 것을 붙잡기 위해 그늘이 따라오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고, 스스로 어두운 쪽을 붙잡으려 달린다.
‘나는….’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알지 못했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 시절 늦가을 이 가 겨울. 그 어둡고 칙칙한 밤. 밤마다 외투를 걸치고는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적의를 품은 듯 나뭇잎을 다 떨구어 버린 자연 속을 헤매고 다닐 때….’
바로 그 날씨가 이국의 빨래방 밖으로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낯선 도시의 겨울밤.
건조된 빨래의 보송보송한 열기에 비를 맞아 이끼 냄새가 나는 이리의 털이 살근댄다. 뮌스터의 겨울날은 뼛속까지 적시는 축축한 추위가 며칠이고 지속 됐다.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라디에이터 옆에 옷가지를 개어 두었다.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정 급하면 내일 점심도 좋습니다.’
페리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미안합니다. 바쁠 텐데요. 원래대로 저녁으로 해도 좋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외국이라 좀 당황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별 일 아니군요. 미안합니다. 좋은 저녁 보내요.’
호텔로 돌아와 이불속으로 들어가 책을 읽었다. 몸은 노곤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책 속의 뮌스터와 오늘의 뮌스터가 동시에 흘러갔다.
“비 오는 겨울날, 납덩이처럼 답답한 지랄 같은 아침이 오기 전에 나는 마침내 잠자리에 들었다…. 아주 극단적인 지점에서. 즉 잠들기 직전, 의식과 무의식의 마지막 경계. ‘검붉은 메모’에 씌어 있는 그 특이한 부분이 섬광처럼 퍼뜩 떠올랐다. 그것은 얼마 전 옛 음악의 박자를 느끼며 불멸하는 자의 냉정하고 밝고 절도 있게 미소 짓는 지혜를 함께 맛볼 만큼 그들과 가까이 있다고 느꼈던 일상의 기억과 연결되었다. 기억은 떠올랐다가 번쩍 빛나더니 사그라들었다. 그러곤 잠이 산처럼 무겁게 이마 위에 몸을 눕혔다.”
책 속 구절과 나의 꿈이 엉켜갔다.
깨어보니 파리한 햇볕이 커튼을 겨우 통과하지도 못하는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기 위해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밤 새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아직 안 일어났어? 하긴 여행 중이지. 네가 없으니까 전시 준비가 힘들어. 내 맘을 딱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늘도 좋은 여행!’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잔잔한 기쁨. 여행지 에서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게도 어엿한 일상이 있었다. 자신감이란 필요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책임감과 필요성. 물론 필요성 쪽이 조금 더 만족을 얻기 쉽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임감 때문에 인생을 투신하는 건, 로맨티시스트가 아니면 불가능하니까.
‘우리는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오래전에 읽었던 구절이 정전기처럼 떠올랐다. 컨디션 좋은 아침이었다. 실내복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아침을 먹기 위해 내려갔다. 뮌스터의 겨울은 커피를 불렀다. 칙칙한 구름 밑에 가라앉은 정신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진한 커피를 찾게 된다. 아침과 저녁을 가르는 것이 해가 아니라 의지인 이곳. 계획을 세워 시간을 직접 쪼개지 않으면 언제 얼마큼 시간이 흘러갔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이방인은 더욱 악착스럽지 않으면 안 됐다.
‘황야의 이리는 왜 이곳에 살았을까.’
나는 책들과 뮌스터, 부츠, 방랑자 그리고 그림자를 생각했다.
‘로키 좋은 아침!’
‘저 지금 출근 중이에요.’
‘자전거를 타고 메시지를 보내면 안 돼.’
‘지금 횡단보도거든요. 이제 못해요. 오늘도 무사히 여행 잘하세요. 그럼.’
‘로키 그 부츠 말인데, 힌트 좀 더 줘. 나도 거의 다 찾았는데. 여행자에게도 시간은 소중하거든? 참, 자전거 조심해서 타.’
로키에게 답이 없다.
호텔 라운지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책을 읽었다.
여유로운 탐정과 같은 일과.
그림자는 밤이 되어야 활개를 치는 법, 아무리 파리한 햇살이라도 해는 해다. 책 속에는 뮌스터에 살고 있는 하리와 황야의 이리, 여러 가지 이름의 바, 그의 애인 에리카, 헤르미네, 그리고 파블로가 등장했다.
작가의 말 :
황야의 이리가 어슬렁대는 뮌스터 여행은 계속됩니다. 이리를 만나면 위험할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