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돌 즈음의 나를 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이 아기가 여자아이 인 지 남자아이인 지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타고났는지 키워졌는지 파김치에 물만밥 한 그릇을 뚝딱할 만큼 대단한 식성을 가졌던 나는 미쉐린 캐릭터 뺨치는 올록볼록 우람한 체구를 자랑했던 데다 굵고 반듯하게 하늘로 하늘로 뻗어 자라는 다소 영웅적 풍모의 범상치 않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기였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함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 엄마의 타고난 미적 감각이었다. 사람들이 자꾸만 갸웃거리자 엄마는 예쁘고 예쁜 옷을 입히고 곱디고운 헤어밴드를 메 아기의 성별을 확실히 하기로 하였다.
이 즈음에서 어떤 개그맨의 아기 관련한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한 지인이 아기를 안고 나왔단다. 오랜만에 만난 애기 엄마가 처음으로 아기를 보여 주는 날이었을까? 아기엄마의 들뜬 표정과 아기가 주는 그 환하고 포근한 느낌이 그들을 감쌌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입에서 “아! 예쁘네!”라는 말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잔뜩 기대를 품고 바라보는 아기엄마의 시선에 어떤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던 그녀의 입에서 이 말이 흘러나왔다.
“어머! 아기네!”
한없이 귀엽고 깜찍하고 귀한 첫째 딸에게 세상에 둘 도 없는 예쁜 옷과 예쁜 머리띠, 예쁜 신발, 예쁜 양말을 입혀 찾아간 이모네 집에서 “어울리지도 않는데 이 머리띠는 얘한테.”라는 진담반 농담인 그 말을 듣고 엄마는 참을 수 없는 화를 쏟아내고 말았다. 엄마는 이모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른 뒤 그 자리에서 나를 안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당황한 이모가 한사코 말렸으나 뿔이 난 엄마를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타자기를 치다 허허허 웃는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랬다니까! 어유 애기가 얼마나 그냥.”
크게 한 번 웃고 나니 검푸른 물속에 묻혀 있던 길이 따뜻한 햇볕에 반짝이며 드러난다. 섬처럼 외로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줄 알고 찔끔거리던 나는, 활짝 열리는 바닷길이 단단한 뭍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오래된 사실을 발견한다.
힘을 번쩍 내 오늘 하루를 살아보자는 용기가 좌절과 낙망의 경험이 만든 내 안의 우울과 비관을 조금씩 몰아낸다. 쩍쩍 갈라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마음 밭의 용기의 샘에 포르르 물이 차오른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속을 썩이고 있었던 것이 무안하게.
세상이 끊임없이 상처를 주려 할 때, 이런 이야기들이 방패가 되어 구겨지고 움츠러든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이것은 젊고 위트 있는 건강한 아빠와 억척스레 세상과 맞선 사랑스러운 엄마 그리고 머리에서 초콜릿 냄새가 나던 천방지축 모글리 같은 말썽꾸러기 동생에 대한 우리 가족의 이야기다.
멋들어진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 눈에 띄지 않는 인생을 사는 것 같아도 나는 기어코 유쾌한 얼굴로 살아가고야 말겠다. 조언할 것은 없지만 이야기라면 있으니까.
연재를 시작합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성게를 이로부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