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사랑하면 아프다는걸.

by 성게를 이로부숴

내게는 애착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백과사전 한 권, 그중에서도 ‘식물’ 편이었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그 책을 펼쳤다. 나만의 아지트로 들어가 줄을 짚어가며 읽고, 그림을 들여다보며 행복에 푹 빠지곤 했다. 나중에는 그 백과사전만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였다.


그날은 집에 손님이 온 날이었다. 앞동에 사는 단짝 친구의 엄마와 세 살배기 동생. 그들은 우리 집에 가장 자주 오는 손님이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엄마와 그 아주머니가 차를 마시고 계셨다.


“엄마한테 들었는데, 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백과사전이라며? 그게 뭐야? 아줌마도 좀 보여줘.”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방으로 달려가 책장에 꽂힌 11권 중, ‘식물 백과사전’을 꺼내 들고 나왔다.


나는 아기와 아주머니 앞에 앉아 사진을 짚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세 살배기 아기는 내 옆으로 기어와 책 귀퉁이를 만지거나 ‘데데데’ 하며 사진을 가리켰다. ‘너도 식물에 대해 좀 아는구나?’ 하며 신이난 나는 실컷 설명을 이어 갔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다시 나만의 아지트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곳은 안방과 내 방을 잇는 통로 끝, 잘 쓰지 않는 화장실 앞이었다. 그곳은 언제나 뽀송했다. 비누 냄새와 바디워시 향이 가득했고, 타일 바닥은 물기 마른 조약돌처럼 보드랍고 시원했다.


나는 가끔 욕조에 들어가 책을 읽었고, 화장실 앞 옷장 밑에 애착 이불을 펴고 엎드려 백과사전을 읽곤 했다. 엄마는 종종 문을 열고 말했다.


“이렇게 어두운데, 밖에서 읽어.”

“덥다, 여기.”

“이불은 또 왜 가지고 왔어?”

“여기서 뭐 해?”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웃으며 말했다.

“그냥요.”


아지트로 돌아가기 위해 거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던 찰나,

“어머머머!”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가슴 한쪽이 쿵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급히 달려나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세 살배기 아기가 내 사랑하는 백과사전 위에 앉아 있었다. 작은 손에는 찢겨진 페이지가 들려 있었고, 책은 구겨지고 침이 묻어 반쯤 젖어 있었다. 몇 장은 아예 떨어져 나가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아기에게 달려가 책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당황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 이거 다시 붙이면 돼. 아기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다.


엄마는 민망한 듯 말했다.


“그만 울어. 네가 그냥 아기 손에 준 거잖아. 아기들은 몰라서 그런 거야.”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대로 방으로 달려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찬 타일 바닥에 앉아 무릎을 껴안았다. 애착 이불을 안고 울고 싶었지만 잠옷이 아니라 찝찝해서 그냥 울었다.


얼마 후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의 손에는 스카치테이프를 들려 있었다.


“같이 붙여보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찢긴 페이지를 하나하나 붙였다.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붙인 그 책에는 테이프 자국이 덕지덕지 남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던 내 사랑스러운 백과사전은 그날 이후 예전의 사랑스러운 빛을 잃고 쓰라린 상처로 가득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어이없는 일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그 후로도 그 백과사전은 내게 소중했지만, 어딘지 예전 같지 않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음 한쪽이 살짝 저렸다.


아마 그때 처음 배웠던 것 같다.


무언가를 너무 사랑하면, 언제나 조금은 아프다는 걸.








이전 04화애착 이불의 최후를 딸에게 알리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