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전 세계의 씨앗은행장!

by 성게를 이로부숴

백과사전이 어색한 성형을 한 그 즈음, 나는 작은 가방을 선물 받았다.


일본에 있던 고모가 보내 준 것으로, 끈과 밑단에는 빨간 인조가죽이 대어 있고 흰색 천 위에는 노란 비옷을 입은 도라에몽 비슷한 캐릭터가 동그란 원 안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가방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아파트 화단에는 여러 가지 식물이 자라고 있었는데, 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꽃잎도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남은 씨앗들이 햇볕에 말라 딱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하고, 반짝반짝 탐스럽게 보여서 군침이 돌 정도였다.


나는 단풍나무 씨앗부터 시작해, 무궁화·나팔꽃·붓꽃 등 온갖 식물의 씨앗을 모았다. 하지만 문제는, 주머니에 마구 담아오다 보니 어느 것이 어느 꽃의 씨앗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다른 색의 꽃에서 땄는데, 씨앗만 보면 모두 비슷해 보여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문구 찬장에서 한 뭉치의 편지봉투를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반으로 잘라 작은 봉투를 만들고, 씨앗을 종류별로 나누어 담았다. 고모가 선물한 가방은 그 봉투들이 딱 들어가는 크기였으므로 매우 흡족했다.


이후 나는 언제 어디서든 봉투를 꺼내 씨앗을 수집했고, 집에 돌아오면 정리하고 이름을 적었다.


‘주황 코스모스’, ‘분홍빛 코스모스’, ‘하얀 코스모스’, ‘단풍나무’, ‘털무궁화’...


거실 한 구석의 찬장을 열면 씨앗 봉투들이 가득했고, 나는 그것들을 보며 마치 부자가 된 듯한 뿌듯함을 느꼈다.


주말이면 늘 그 봉투들을 꺼내어 다시 보고, 만지고, 정리했다. 그러다 봉투가 너무 많아져 찬장 문을 열면 씨앗 봉투가 와르르 쏟아져 내릴 지경이 되었다.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엄마가 말했다.

“이거 이제 좀 버려라. 다 썩겠다.”


내 보물 창고가 들통난 것이다.


나도 지저분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버리려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하나 내가 따 모은 정, 봉투마다 그려 놓은 그림과 이름들이 떠올라서였다. 그래서 저녁이 되도록 거실 한가운데 씨앗을 펼쳐 두고 어물쩡거리기만 했다.


참다못한 엄마가 직접 정리에 나섰다. 엄마는 누렇게 바랜 봉투들을 골라내며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울며 매달리던 나도, 봉투에서 나는 꿉꿉한 냄새와 벌레 이야기에 그만 손을 털고 화장실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그렇게 정을 끊어버린 것이다.


결국 비교적 최근에 모은 씨앗들과, 차마 버릴 수 없는 몇 봉지만 남았다. 그들은 다시 고모가 준 그 작은 가방 안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나는 예쁜 식물을 보면 다 가지고 싶다. 나의 꿈은 언젠가 오랑주리(온실)를 갖는 것이다. 노르웨이에 있다는 ‘세계 씨앗 저장고(Svalbard Seed Vault)’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 때, 생각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씨앗을 모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언젠가 꼭 그곳을 방문해 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나만의 작업실을 가지면, 다시 나만의 씨앗창고를 만들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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