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et Perry There | 14.
이제는 더없이 친근한 나의 방으로 돌아와 실내화와 실내복, 가운까지 갖춰 입고 나니 더 이상 외로운 타지의 여행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독일어 철자법을 알 수 없어 몇 번이나 검색에 실패했지만 자동완성 기능을 빌어 무사히 검색에 성공했다. 로키 말대로 아동 부츠로 가득한 창이 나왔다.
“마기셰 슈티펠….”
동시 번역이 가능한 시대.
주변이 스마트해질수록 사람은 바보가 되어 간다.
무언 가 얻는 대신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지만 너무 큰 것을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순간 스스로 읽는 일도 불가능 해지는 건 아닐까. 무엇이든 알 수 있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사유 능력은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 물론 신뢰할 수 없는 정신으로 살다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도 사람들의 감각을 사로잡는 작품을 만든다. 또 훌륭한 인생을 살았음에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프루스트가 사랑해 마지않던 러스킨이 나중에 그 매력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질베르트를 사랑하던 날들과 알베르틴을 사랑하든 날들이 모두 마르셀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쪽은 잊어버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람은 좌뇌와 우뇌가 있고, 신장 한쪽을 떼어 낼 수도 있다. 심장 이식이 가능한 시대에 하나를 위해 하나를 잊으란 말은 시대에 한 참 뒤떨어진 건 아닌가.
‘속을 들여다볼수록 조악한 자신을 견디는 것.’
진은 괴로워하는 내게 늘 대담해질 것을 요구했다.
완벽에의 가장, 흠 없는 나의 세계.
그녀는 그런 요염한 전환에 능숙했다. 떳떳하지 못한 부끄러운 자신을 내걸고 순진무구한 시선을 견딘다. 나조차 사랑할 수 없는 내 속엔 편협한 혐오에서 비롯된 소심함이 있었다. 어느 정도 요령 있는 처신이 필요했으나 나는 거기에 능숙하지 못했다.
모든 작가는 검은 속내를 감추고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가련한 관객들은 그 입 속에 있던 어떤 이빨에 물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에 파편을 맞고 만다. 그 파편은 인생이라는 살점에 서서히 덮일 것이다. 결국 각자의 문제가 되겠지.
‘아무래도 내 사진을 고르지 마. 형편없어.’
진에게서 곧장 메시지가 왔다.
‘벌써 넘겨버렸는데? 누런 풀밭에 콧김을 내뿜는 거대한 사슴. 어딘지 급박한 데가 있던데? 다들 마음에 든대. 미술관에 걸리는 것도 아닌데.’
다음 메시지가 왔다.
‘대단한 금액은 아닐 거야. 그래도 맛있는 저녁을 몇 번 더 사 먹을 수 있잖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진은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나는 가운을 입은 채 잠들었다.
여행자도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지 않으면 엷은 죄책감이 든다.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일어나 세수와 면도를 했다. 옷을 다려 입고 싶어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곧 누군가 노크를 했다. 전날의 불피우스 씨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 셔츠들을 세탁하고 싶은데요.”
그가 깍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릴까요?”
불피우스 씨가 눈을 굴렸다. 나는 그의 약삭빠르고도 쾌활한 표정을 알아차렸다.
“제가 직접 세탁소에 맡기고 몇 시간 안에 찾아오는 방법도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투숙객들에게 팁을 두둑이 받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불피우스 씨는 재빠르게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움직인 건 지 눈썹을 움직인 건 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동작이었다.
“그럼 문을 닫겠습니다.”
오랜 여행을 하려면 정갈한 생활을 해야 했다. 옷들을 옷걸이에 하나하나 걸고,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가운을 건 다음, 이니셜이 박힌 슬리퍼를 가지런하게 두었다.
어느 정도 햇볕의 질감이 느껴지는 날씨였다. 새오를 만났던 돔 쪽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크로와상과 잼을 시켰다.
‘로키 안녕?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꼭 오라고. 뭐 하면 여자친구랑 같이 와도 되니까.’
한창 일을 시작할 시간, 상사에게 쩔쩔매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도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순순한 녀석이 아니니 외로운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기다리지 마세요.’
의외로 금방 답장이 왔다. 섬세하게 도시락을 싸는 부지런하고 순진한 녀석에게 나는 조금 더 매달렸다.
‘저녁때 보자.’
책을 읽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새오를 기다렸다.
햇살 몇 줄기가 장미 한 송이가 담긴 유리 꽃병에 맺혔다 사라졌다. 장미도 그림자를 가지는 날이니 그림자가 없는 사내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도시를 거닐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파리하게 질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절망했다. 회색 코트를 입은 녀석을 찾아내면 그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
지난 밤 로키가 가르쳐 준 가게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정말 마법의 부츠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줄자를 목에 걸고 직각자를 든 노인이 입구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무엇을 찾으시나요?”
금테를 두른 동그랗고 작은 돋보기를 코에 걸고 상대의 눈을 깊숙이 바라보는 노인은 편안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좋은 옷 맵시를 자랑하는 날렵한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행동이 느린 듯 했지만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몸에 꼭 맞는 신사복을 갖춰 입은 노인이 오래된 나무 장과 어울려 당장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망설이자 그가 먼저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쪽 자리에 잠깐 앉으시지요. 발 사이즈를 재면 이야기가 쉬워지니까요.”
노인이 손을 벌려 자리로 안내했다. 그곳엔 나지막한 1인용 소파들과 편안하게 발을 올릴 수 있는 쿠션을 댄 받침대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신발 가게보다 고풍스러운 19세기 사교장의 휴게실에 같았다.
그가 안내한 소파는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높이가 매우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부드러운 쿠션감을 가진 섬세한 가구였다. 조금 더 안 쪽에는 나이가 지긋한 부인이 몇 가지의 신발을 신어 보며 점원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라츠만 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임은 이라고 합니다.”
라츠만 씨가 빙그레 웃으며 자를 들어 발에 댔다.
“자, 그럼 이제 사이즈를 재겠습니다. 신발을 벗어 주시면 좋습니다.”
신사다운 몸가짐이 온 몸에 구석구석 밴 사람이었다. 서둘러 구두 끈을 풀었다.
“임은 씨는 센스가 좋으시군요. 구두가 아주 멋집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혹시 걸을 때 불편한 점은 없나요? 제 말은 발가락이나 엄지 뿌리 뼈 말입니다. 뒤꿈치 위 쪽이 조금 걸리진 않습니까?”
그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천천히 말했다.
“오래 걸으면 말씀하신 곳이 조금 아픕니다. 구두는 어쩔 수 없죠.”
라츠만 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발에 잘 맞는 구두는 신사의 발을 아프게 하지 않지요. 제임스 본드도 구두를 신고 일합니다.”
발을 찬찬히 살피던 라츠만 씨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제임스 본드라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그 구두에 뭔가 비밀이 있던 지요.”
자연스레 농담을 건넸다.
“마법 같은 힘을 가진 구두들이 종종 있지요. 구두에 관한 옛날 얘기를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라츠만 씨는 눈을 반짝이며 발 곳곳의 사이즈를 정성스레 쟀다.
“카드를 만들어 두려고 하는데 괜찮으십니까? 가게에 보관하는 것이 걸리시면, 이 카드를 가져가셨다가 다음 번에 방문하실 때 보여 주셔도 됩니다.”
“좋은 서비스군요.”
“우리 가게는 오랫동안 이렇게 손님과 함께 해 왔지요. 발을 알면 그 인생을 알 수 있어요. 임은 씨는 아직 걸을 일이 많이 남은 발을 가졌군요. 그러니 좋은 신발이 필요 할 겁니다.”
라츠만 씨도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그렇습니까.”
“좋은 신발을 오래 신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엔 유행에 따라 여러 켤레의 신발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많은 것이 꼭 좋은 건 아니지요.”
나는 라츠만 씨의 신발을 보았다. 한 눈에도 잘 길들인 가죽으로 만든 훌륭한 신발이었다. 어딘지 그 신발에서 라츠만 씨가 보였다.
“이 신발은 아주 오래 됐지요. 발에 꼭 맞는 신발은 쉽게 닳아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풀이 자라고 스러지는 누런 벌판이 다시 푸른 색으로 물드는 시간을 수만 번 지켜볼 때 느끼는 감동 같은 것을 느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몇가지 추천을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별로 신발을 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조언을 듣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마침 좋은 원두가 있습니다.”
이미 커피를 마셨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커피는 라츠만 씨가 아니라 단발 머리를 한 아가씨가 가져다 주었다. 카펫을 밞는 소리도 없이 공기처럼 걸어 다니는 여자였다. 커피는 포르토에서 마셨던 비카 맛이 났다. 그녀는 신발가게의 홀을 오가며 연세가 지긋한 이 가게의 점원들을 도왔다.
십 여분이 지났지만 라츠만 씨를 만날 수 없었다. 안 쪽에서 신발을 고르던 노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좋은 신발을 갖게 될 거예요. 이 신발가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거든.”
그녀는 거의 눈을 감고 웃었다. 노인들 특유의 얇은 눈두덩이가 여린 장미 색으로 빛났다. 할머니들이 그렇듯 노부인은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묻지도 않은 옛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어떤 전쟁에서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는 청년이 있었어요. 그 청년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부츠를 산 곳이 바로 여기랍니다.”
그녀는 비밀 이야기를 들려 주듯 알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독일 사람들은 신발가게에서 군화를 사나요?”
그녀가 검지를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법의 구두라고 불렀지.”
“마기셰 슈티펠?”
노부인은 나의 독일어 발음을 알아들으려 입 모양을 자세히 보았다.
“아, 매직 부우츠?”
한 편 한 편 따라와 주시는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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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목요일 밤,
판타지 미스터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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