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구두와 자전거의 도시

Meet Perry There | 15.

by 성게를 이로부숴

단발머리 아가씨가 소리 없이 다가와 노부인에게 포장한 신발이 담긴 가방을 건넸다. 나와 노부인 사이를 가로막고 선 그녀는 노부인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언어 란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듣는 것이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의 손을 잡은 공기가 귀 속으로 불었다. 사실 나의 고막은 그 소리를 통과시키지 못하고 튕겨내는 데 그 힘을 다 쏟고 있었다. 곧 라츠만 씨가 벽장 속에서 몇 켤레의 구두를 안고 돌아왔다.


“임은 씨에게 맞는 구두를 찾는 데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그럼, 신어 보시겠습니까?”


혹시 이렇게 오랫동안 골라온 구두가 맞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는 차에 라츠만 씨가 말했다.


“신발은 그저 우리가 신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안 맞는 신발은 잊어버리면 되지요. 그게 제 일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발을 넣어 보세요.”


첫 번째는 갈색 가죽 구두였다. 디자인이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지만 반드시 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구두는 아니었다. 다행히 오른쪽 발 부리에 조금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이 신발은 안됩니다. 오래 걸을 수 없지요. 시내에서 볼일을 보기는커녕 여기서부터 아아 호수까지도 못 갈 겁니다.”


“아아 호수를 몇 바퀴나 돌아도 될 만한 신발을 찾기 전엔 보내주지 않으실 것 같은 같은데요?”


“이 뮌스터를 하루 만에 다 걸을 수 있는 신발을 찾을 때까지는 안되지요!”


라츠만 씨가 내 눈의 깊은 곳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두 번째 신발의 끈을 풀었다. 왠지 두근거렸다. 라츠만 씨는 구두 주걱을 들어 부드럽게 구두 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한 번 일어서 보시겠습니까?”


거울을 보았다. 구두는 매우 훌륭했다. 바지 단이 떨어지는 곳부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코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라츠만 씨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이지만 조금 걸으면 발을 점점 조여 올 겁니다. 오래 신기에 좋은 구두는 아니지요. 임은 씨의 발이 부딪힐수록 더욱 뻣뻣하고 질겨질 거라고 설명을 드리지요.”


세 번째와 네 번째 신발 역시 라츠만 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지막 구두는 넉넉해 보이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엄지발가락 뼈에서 걸렸다. 라츠만 씨는 매우 슬퍼 보였다.


“괜찮습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라츠만 씨는 골몰해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임은 씨에게 맞는 신발이 반드시 있습니다. 뮌스터에 조금 더 머무르시나요?”


나는 내심 값비싼 신발을 갑작스레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네, 머무르긴 합니다만…. 그렇게 까지 찾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행자에게 꼭 맞는 신발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요. 다른 것을 포기하더라도 발만큼은 그러면 안 되는 법입니다.”


라츠만 씨는 완고한 스승처럼 엄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코스 요리를 한 번 먹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알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일 후에 시간 어떠십니까? 그때까지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선호하는 색상이나 꼭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있나요?”


“특별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은 씨라면 어떤 신발이라도 잘 소화를 할 겁니다. 좀 화려한 스타일은 어떻습니까?”


나는 신발가게를 둘러보며 한쪽 코너를 가리켰다.


“저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탈리안 스타일이요?”


“이탈리안 신사들은 붉은 양말에 노란색 구두를 신는 것을 겁내지 않지요.”


“저런 것도 좋습니다. 벌써 기대되는군요.”


“인생에는 앞으로 기대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법입니다. 끝까지 기대를 해야 하고 말고요.”


라츠만 씨의 눈이 빛났다.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저…. 마기셰 슈티펠도 있습니까?”


그는 잠시 눈을 돌려 생각에 잠겼다.


“북쪽의 마기셰 슈티펠?”


라츠만 씨가 짧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건 좀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게 임은 씨의 발에 맞을지도 모르죠. 알겠습니다.”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진 것이 놀라웠다.


“그럼, 그걸 살 수도 있는 겁니까?”


라츠만 씨가 몸을 움츠리며 그게 왜 안될 일이냐며 뒤로 물러서서 팔을 들었다.


“3일 뒤를 기대하세요. 카드는 여기에 두고 가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요.”


내가 신발 가게를 나가자 라츠만 씨는 동굴처럼 깊숙한 신발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마법의 부츠는 라츠만 씨에게 맡겨 놓기로 했다.





하리처럼 어슬렁거리다 휘황한 마술극장을 발견할지도 모르다는 생각에 돔 광장에서 지도를 펼쳤다. 결국 가보지 않은 길들을 이용해 최대한 뮌스터를 돌아보기로 했다.


뮌스터는 산책 겸 설렁설렁 걷기 좋은 도시였다.


언덕이 없는 평탄한 대지에 빽빽하게 돋은 나무 사이로 난 길들. 말들의 속력에 따라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돌 길에 솟은 종탑들. 그러나 수없이 벨을 울리며 달려오는 자전거에 막혀 번번이 멈춰 섰다.


“자전거를 사야겠어.”


오리너구리를 열어 자전거 대여소를 검색했다. 나는 지도를 끄고 역 쪽으로 걸었다. 여행자 티를 벗으려면 역시 지도부터 꺼야 한다.


“이런 걸 새로 사려면 얼마나 합니까?”


“한 천 유로 됩니다.”


나는 조금 더 연식이 있어 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저건 더 비쌉니다. 가젤 모델은 인기가 많습니다. 튼튼하거든요. 할머니가 타던 걸 손녀가 물려받는 정도니까. 연초라 아쉽게 됐군요. 뮌스터에는 중고 자전거 시장이 종종 열리는데, 1월이라….”


한 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덩치 좋은 청년이 무언가 생각 난 듯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무언가 작은 종이책자를 들고 나왔다.


“혹시 중고를 찾고 있으면 여기를 잘 찾아봐요.”


그것은 길거리를 다니며 종종 보았던 작은 수레에 눅눅하게 쌓여 있던 작은 책자였다.


“이게 뭡니까?”


“Nadann, 뮌스터 소식지예요. 자전거가 많이 나오거든요. 뮌스터니까요.”


몇 장을 넘겨 보았다. 안에는 사전처럼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가 보였다.


“거기 보이는 번호로 전화해 봐요. 사실, 오늘은 좋은 자전거가 별로 없거든요. 다음에 한 번 더 들러 보세요.”


검은 자전거 체인 기름이 묻은 정직한 손을 보니 믿음이 갔다. 버려진 자전거들을 고치는 손. 잘 정돈된 일상의 냄새. 하리는 이 냄새를 싫어하겠지만.


“이건 어떻습니까?”


나는 구석에 있던 낡은 자전거를 골랐다.


“이건 정말 오래된 건데…. 이거 말고 저건 어떻습니까?”


청년이 땀을 닦으며 물었다.


“아니요. 이게 좋습니다.”


나는 그의 정직한 표정을 믿었다.


“만약에 달리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다시 오세요. 좀 타 보시겠어요?”


거대한 지하 자전거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브레이크도 괜찮았고, 안장도 푹신했다.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뭔가 있으면 곧장 오세요.”


자전거 한 대를 사는데 사인을 몇 개나 했다. 자전거 하나를 사고파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사인을 해야 하는지 촘촘한 절차에 놀랐다. 독일인들의 치밀함 이란 이 작은 도시의 자전거 센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마지막으로 손해 배상 보험을 위해 여러 점검을 하고 동의하는 것으로 절차가 끝났다.


자전거를 사고 나니 활동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나는 구시가지를 둘러싼 가로수 길을 시원하게 내달렸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길에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봄이 되면 어떤 잎이 날지 궁금했다.


페리 말 대로 옛 돌길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에는 최악이다. 오래되어 포장석 사이가 넓은 곳이 특히 나빴다. 역시 생활의 감상이 낭만을 이겼다. 낭만은 편안함 앞에 이토록 쉽게 바스러지는가.


아아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외곽 산책로에 접어들자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찬 바람이 부는 호숫가에서 장갑 없이 자전거를 타니 손이 엤다.


“나가는 샛길 같은 건 없나?”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휑한 길.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다.

그 길을 달리며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것은 포르토에서 계절을 가늠할 수 없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손 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축축한 바람이 부는 길,

절대 봄으로 착각할 수 없는 파리한 낮이었지만 분명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 이질감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것은‘잔디’였다. 놀랍도록 푸르른 잔디.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왜 이 도시의 잔디는 이토록 푸르른가.


그것은 봄을 넘어 가히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었다. 방금 머리를 깎은 듯 푸르뎅뎅한 풀로 이 평평한 도시는 잔뜩 덮여 있었다. 우울하고도 우중충한 회색 하늘을 이 푸른 풀이 막아내고 있었다. 답답한 비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겨울을 지탱하는 힘은 바로 이 푸르른 잔디밭인가. 눈비를 뚫고 자라는 잔디. 결코 노랗게 쇠지 않는 잔디.


황야의 이리는 이 잔디를 밟으며 생명을 연장한 것이었다. 하리가 죽을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잔디의 생명력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이렇게 푸른 벌판을 바라보며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겨울 잿빛으로 호수가 얼고, 나무는 죽은 듯 잎눈을 감더라도. 잔디만은 끝까지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여기, 나는 끝까지 살아있다.’


뮌스터의 잔디는 언제 죽는 것일까. 나는 이 잔디의 생리를 알기 위해서라도 여름까지 뮌스터에 머무르고 싶어 졌다. 다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돌담 사이의 검은 철문에 Alter Zoo 라 쓰여 있었다.


호숫가를 조금 지나니 건물 2층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Sad Walk의 도입부였다. 찬 바람이 불었다. 곧 비가 내리려는 지 구름이 도시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다. 노란색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 밖으로 나의 그림자가 지쳐 늘어졌다.


반가운 마음이 들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나의 뒷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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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푸른 잔디들이 소리치는 뮌스터에 놀러오세요."




연재로 읽기에는 힘드시지요? 아무래도 한 권을 통째로 끼고 읽어야 하는 소설입니다. 종이책이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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