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장이 만드는 '연결'의 가치
천 원짜리 몇 장
우리 세대의 부모님이 다 그렇듯, 두 분 모두 너무나 바쁜 삶을 사셨고,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난 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는 마지막 숨을 이 땅에 남기신 그날까지, 손주 건사하는 게 유일한 낙처럼 느껴질 정도로 지극 정성으로 나를 아끼시고 사랑하셨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몸이 젖을까 우산을 학교로 가져다주시는 분도 할머니셨고, 잊고 간 준비물을 학교 경비실에 맡겨 주시는 분도 할머니셨으며, 운동회에 김밥 싸들고 와서 응원해주신 분도 할머니셨다.
초등학교 시절 가장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가 초등학교 근처에 있었던 '흑석시장'을 할머니와 함께 놀러 가는 것이었다. 흑석시장은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한 전통시장이다. 동네의 규모가 크지 않기에 전국적인, 아니 서울에서라도 이름 난 전통시장은 아니었지만,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있을 것 다 있는, 사람 향기 짙게 벤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손주와 함께 시장을 가실 때면, 할머니는 평소 생활비를 아껴 호떡이며 돼지 간, 허파, 염통 등과 푸짐하게 나오는 순대를 사주시곤 했다. 전통시장의 모든 공간이 좋았지만, 특히나 나에게 가장 해피한 순간은 소위 메이커 없는 운동화와 구두로 가득 차 있는 보세 신발 가게를 들릴 때였다.
놀이 거리라고는 바람이 약간 빠진 축구공을 운동장에서 차는 일밖에 없었을 때인지라, 내 운동화는 정말 자주 헤졌다. 가뜩이나 발 모양이 칼발이라 엄지발가락 쪽에 구멍이 자주 뚫렸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굵은 실로 기워주셨다. 더 이상 바느질로 어찌할 수 없을 때, 할머니는 보세 신발 가게로 내 손을 잡아 이끄셨다.
보세 신발 가게 안에서 할머니는 조각 천으로 된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까지 난 이때의 고마움을 다 표현하지 못했다.
전통시장의 가치
대학생이 된 후에도 흑석시장에 가면 알아보는 분들이 꽤 계셨다. 늘 같은 자리에 계신 분들. 흑석시장의 명물 호떡 장사 아줌마, 구제 옷 가게 주인아저씨, 보세 신발 가게 주인아저씨, 그리고 흑석시장 초입에서 붕어빵을 팔던 붕어빵 아줌마, 짜장면이 너무 맛있었던 중국집 아줌마와 아저씨. 사실 이분들 모두 한때 같은 반이었던 내 친구의 엄마, 아빠들이다. 친구 몇 명의 이름은 아직까지 기억난다.
전통시장이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경제적 가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이 곳을 일터로 삼는 전통시장의 수많은 사장님들에게는 이윤이 많이 남아야 하겠지만, 도시와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전통시장이 생산하는 가장 큰 가치는 사회적 가치 중 하나인 '연결'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우리 지역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의 지점장이 누군지 모른다. 마트에서 일하는 점원, 경비를 서는 보안 요원, 약국 아저씨, 안경집 사장님 등도 잘 모른다. 그러나 전통시장은 파는 이나 사는 이가 모두 '앎'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통시장은 친숙함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도시와 사회는 개인의 '연결'로 만들어진다. 세상의 모든 존재(being)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 기쁨이 이웃의 기쁨이 되고, 이웃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줄 같은 것이 우리를 묶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비록 내 아이가 저 배 안에 없었을 지라도,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상처 받고, 아프고, 울고, 분노한 이유는, 뭔지 모르는 어떤 힘에 의해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연결이 끊어지면, 서로에 대한 '앎'의 부재로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갈등을 겪는다. 전통시장이 만드는 '연결망'이 소중한 이유이다. 연결망이 공동체를 유지한다.
하남 아웃라인
큰 강과 맞닿아 있는 도시는 개발에 대한 수요가 높을 수밖에 없다. 리버 뷰(river view)만큼 주택 가격을 끌어올리는 것도 없으니까. '강의 남쪽'이란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남은 한강과 맞닿아 있는 경기도 동부의 도시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하남'의 대략적 위치는 잘 몰라도, '미사리'라는 지명은 매우 익숙할지 모른다. 미사리 조정경기장, 미사리 유적, 미사리 카페촌 등이 미사라는 지명을 전국구로 만들었다. 미사리가 바로 이 하남에 있다.
조정경기장, 카페 등으로 유명했던 미사는 원래 개발제한구역으로 오랜 기간 개발 소외 지역이었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세대 맞춤형 주거 공간의 건설을 위해 미사강변도시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2014년에 첫 입주가 시작되었다. 개발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하남의 2015년 인구는 15만 명 정도였으나 불과 4년 후인 2019년에는 26만을 넘어서고 있다. 도시의 개발이 모두 마칠 때 즈음에는 40만 명을 넘어설 것이란 예측도 나오고 있는 실정.
미사강변도시의 개발과 함께 때 맞춰 쇼핑 공룡 '스타필드 하남'이 미사대로에 개장(2016년)하면서 하남의 중심이 신장동과 덕풍동에서 미사지구로 급격하게 이동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미사지구와 신장동, 덕풍동이 매우 근접해 있다는 점이다. 운전하면 15분 이내에 미사지구에서 신장동과 덕풍동 어디든 갈 수 있을 정도로. 실제로 미사강변도시는 덕풍동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 구도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이다. 미사지구의 대형 상권이 구도심의 상권을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시장, 하나의 연결망
스타필드까지는 크게 동요하지 않던 구도심의 상권이 2019년 4월 대형 실내 쇼핑몰인 '코스트코 하남점'이 개장하면서 술렁거리고 있다.
하남의 구도심인 신장동과 덕풍동에는 신장전통시장과 덕풍전통시장이 있다. 두 시장은 서로 다른 매력이 있으며, 두 시장 모두 규모는 하남시의 인구수를 고려할 때 큰 편이다. 두 시장이 하남에 남긴 발자취가 작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교수님, 하남에 오시면 신장시장에 있는 정덮밥을 꼭 드셔 보세요! 완벽한 한 끼가 되실 수 있어요!"
하남의 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센터장으로 발령을 받자 제자 중 하남 토박이로부터 인스타 디엠이 왔다. 신장시장을 둘러보기 전에, 꼭 정덮밥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제 20살 남짓 살아왔겠겠지만, 토박이가 인정하는 덮밥집이라니.
신장시장에는 주차장이 있다. 차로 방문을 하고자 한다면, 신장전통시장 공영주차장을 검색하면 비록 좁은 길을 따라 운전해야 하지만 찾는 것 자체는 쉬울 것이다.
정덮밥은 메뉴의 종류는 많지 않았으나, 주문한 메뉴마다 맛있었고, 완벽한 한 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게의 모습 자체가 정덮밥의 '나이'를 말해주는 듯하다. 사장님은 이 곳에서 18년 간 가게를 운영하셨단다. 청년 시절부터 이어온 삶의 터전일 것이다. 곧 20주년 일터인데, 40주년까지 건강히 자리를 지켜 주시길. 이 집은 내 단골집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주차장 출입구를 기준으로 시장의 주 로드(road)는 'ㄴ'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사랑 가득 신장시장 사람 가득'이라는 빨간색 간판이 커다랗게 서 있는 문을 통과하면 천장이 있는 거대한 돔 같은 전통시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2019년 6월부터 11월까지 매월 4일과 19일 신장시장 특화장날이 열리는 듯하다. 플리마켓과 문화체험 행사가 열리는 것으로 보이는데, 시장을 문화와 예술로 특화하여 우리의 후속 세대에게 이 시장의 스토리를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일 것으로 확신한다.
신장시장의 대문을 지나면 아주 긴 터널 같은 시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들어가는 문부터 나오는 문까지 거리가 족히 100미터는 될 것만 같은,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 큰 시장이다. 정육 가게, 닭집, 과일가게, 물고기 가게, 떡집, 건어물 가게, 중고 옷집, 보세 신발 가게 등, 우리가 전통시장에서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이 한 공간에 있었다. 당연히 간식거리도.
시장을 직선으로 바라볼 때는 몰랐는데, 가게 하나하나를 살펴보니, 코스트코 입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가 달려 있었다.
"하남 재래시장 상권 누가 지키는가?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 반드시!!"와 같이 결의에 찬 메시지부터, "아빠, 오늘도 파이팅. 내일 우리는 어떻게 해요? 아빠~"와 같은 감성적인 메시지까지. 가게마다 모두 다른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그만큼 간절한 문제일 것이다. 전통시장 구성원 모두에게 상권의 붕괴는 생존과 연결된다.
주차장 출입구를 기준으로 시장의 주 로드(road)는 'ㄴ'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음을 앞서 적었다. ‘사랑 가득 신장시장 사람 가득'이라는 빨간색 간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하늘이 뚫려있는 또 다른 골목이 보인다. 여기도 '신장시장'이다. 비교적 짧은 길이지만, 이 길 또한 보는 재미, 사는 재미가 가득한 길이다. 전통시장의 시그니쳐 아이템들이 손을 맞이할 준비가 한창이었다. 드문 드문 담소를 나누는 손님과 사장님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이 것이 바로 전통시장의 가지는 최고의 매력이다. 바로 너와 나를 우리로 묶는 '연결'.
신장시장에서 덕풍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큰길을 따라 걸어도 충분하다. 물론 짐이 많거나 날씨가 안좋은 날이라면, 신장시장 주차장에서 '덕풍전통시장 공영주차장'을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해 이동해도 괜찮다. 다만, 운전하는 도로 폭이 넓지 않고, 신호등 간의 거리가 워낙 짧아 차라리 걷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덕풍시장의 주차장은 상대적으로 현대화되어 있었다. 매우 넓은 공간에 주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다. 신장시장은 주 도로의 폭이 좁아 차량 진입 자체가 되지 않는데, 덕풍시장은 주 도로의 도로 폭이 넓어 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장시장보다 훨씬 넓은 주차장을 자랑하고 있었다.
덕풍시장의 하늘은 만국기가 데코하고 있다. 그래서 야시장 같다. 덕풍시장의 분위기는 신장시장과 완전히 다르다. 마치 이 두 전통시장이 우리는 경쟁하는 대체제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상쇄하는 보완제임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신장시장은 우리가 전통시장하면 떠올리는 전형과도 같다면, 덕풍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 차라리 먹자골목에 가깝다. 물론 이 시장에도 잡화나 금은방, 한약방 같은 가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삶을 나누며 소통해도 누가 핀잔 한마디 하지 않을, 그런 코리안 스타일 레스토랑으로 충만한 공간이다.
덕풍시장의 입구가 되는 문이다. 어울림을 의미하는 듯한 로고가 인상적이다. 이 문을 통해 나가서 신장시장까지 걸으면, 성인 남자 기준으로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두 동에 걸친, 두 개의 다른 시장이 하나의 커다란 연결망으로 연대하고 있다. 마치 거대한 단 한 개의 유기체처럼.
후기
하남시의 시장님, 두 시장 상인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 임원, 그리고 관계 부서 공무원이 모여 술 한잔 하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시장님께서는 하남 사회적경제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비대위 임원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타필드 하남, 코스트코 하남점 등 대형 쇼핑몰의 입점 이후 상인의 삶이 더 나아졌을 리 없다. 실제 수입의 증감과는 상관없이 도시의 현대화는 전통시장 상인의 사기를 꺾는다. 그래서 비대위가 결성되었고 다양한 요구가 이미 시에게 전달되었다.
물론 비대위의 요구를 전부 정책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재정의 부족, 실행 능력의 부족 등 다양한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도시가 이런 전통시장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 공간은 다양한 업에 종사하는 사장님들과 시민들이 소통하는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앎'으로 만들어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소통의 공간에서 오고 가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가 끊기면, 도시의 구성원들이 벽을 허물고 서로에게 다가갈 최후의, 최고의 수단이 사라 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남은 과제는 이 소중한 공간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이어주는 것 아닐까.
연결망의 가치는 사이버 세상이 우리 현실의 삶을 대체하면 할 수록 커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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