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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진 Jul 28. 2018

도시, 살다 4화 -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오래된 도시에서 역사적인 도시로

오래된 도시


도시도 나이를 먹는다. 도시는 사람, 시멘트, 풀로 구성된다. 사람도 나이를 먹고, 시멘트도 나이를 먹고, 풀도 나이를 먹는다. 풀이야 알아서 스스로 자손을 남기니 논외로 하고, 사람과 시멘트가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도시에게 큰 고민거리이다.


도시 안의 사람을 하나의 '종'으로 본다면 사람이 늙는 것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 성장하고, 부모님은 하늘로 떠나셔도 내가 있고, 나의 자녀가 있다. 언젠가 나도 하늘의 부름을 받아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더라도 내 자녀가 있고, 자녀의 자녀가 도시 안에 남겨질 것이다. 그래서 종으로서의 사람은 늙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자녀가 우리의 도시를 떠나 새로운 도시로 떠나버린다면? 내 자녀의 자녀는 명절이 되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고 절대 내가 태어나 성장하고 교육받고 자녀를 키우기 시작한 나의 도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러면 도시는 늙는다. 청년 세대는 떠나고 그들의 자리를 채워야 할 다른 청년 세대가 우리의 도시로 오지 않는다면, 도시의 '늙음'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늙음'이 진행되는 도시를 우리는 구도심(old town) 혹은 원도심(original town)이라 하는데 모두 신도시에 대비하여 오래된 도시를 의미한다.


시멘트도 나이를 먹는데 어쩌면 사람이 늙어가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새로운 건물에 대한 선호는 오래된 건물을 빈 건물로 방치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다. 철거하고 다시 건축해야 하는데 늙은 도시에 새로운 건축에 대한 동력이 충분할 리 없다.


그런데 오래된 도시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장점이 있다. 바로 '역사'이다. 새롭게 탄생한 도시가 그 어떤 가치를 내세우든 간에 거기에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롭게 이주한 사람들이 몇 가지 공통점 , 예를 들어 육아, 교육, 문화 등으로 친분을 쌓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어도 '오래됨'의 끈끈함은 없다.


오래된 공동체가 명맥을 유지한다면 도시의 재생에 불씨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건물이 비록 때가 많이 탔어도 지역을 상징하고 역사적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보존의 가치가 더 커지게 되고 때때로 이런 보존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제주도의 아라리오 뮤지엄은 이런 예를 잘 보여준다.


Simple with Soul


아라리오 뮤지엄은 크게 네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인스페이스(in space)는 서울에 있고 나머지 세 개의 건물은 제주도 제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제주시의 아라리오 뮤지엄은 각각 탑동시네마, 동문모텔 I, 동문모텔 II로 불리는데 뮤지엄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전 활용되었던 공간의 특성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애월을 둘러보고 아라리오 뮤지엄을 만나기 위해 제주시의 산지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주차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걸어서 모텔로 향했다. 공영주차장에 내려 북성교(사진에 보이는 다리)를 건넜다. 아라리오 뮤지엄의 시그니쳐는 무엇보다도 건물의 색인 듯했다. 아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잘 찾아왔구나.


이 일대는 제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용천수(바위 틈새로 솟아나는 담수)가 솟아나는데 산지천의 영향으로 보인다. 바닷길로 제주로 들어올 때 예전부터 가장 많이 활용된 물류의 중심이 된 하천이 바로 산지천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산지천을 따라 작은 가게들과 주거지가 모여있고 동문재래시장도 크게 만들어졌다. 바다에서 산지천을 따라 쭉 걸어오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아라리오 뮤지엄의 빨간 건물이다.


산지천의 모습이다. 저 끝은 바다. 제주도에 얼마되지 않는 담수를 만날 수 있고 산지천을 중심으로 동문재래시장과 다양한 모텔과 여관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사실 어떤 건물이 동문모텔 I이고 II인지 모르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빨간 건물부터 찾아 들어갔다. 사실 애월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해 뮤지엄의 클로징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으로 충분히 예측되어 마음이 좀 급했던 모양이다. 티켓팅을 하고 들어서 보니 이 건물이 동문모텔 II였다. 동문모텔 II는 지상 5층 건물인데 과거 대진여관(1975~2005)으로 불리던 곳을 사들여 2015년에 뮤지엄으로 새롭게 개장하였다 한다.


바로 아래서 찍은 클로즈업 사진. 동문모텔 II이다.


'Simple with Soul'은 예술가이자 사업가인 김창일 회장의 철학을 담고 있다. 외벽은 서울과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의 시그니쳐 형성을 위해 빨간색으로 새롭게 디자인했지만 내부 전시 공간은 여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동문모텔 II의 구조는 기존 여관의 내부를 최대한 살리되 모든 방들을 터 넓게 전시관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방문 당시 동문모텔 II에서는 "아빠 왔다(I'm Home)"라는 타이틀을 건 전시가 모텔의 모든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라리오 뮤지엄 측에 따르면, 37세에 요절한 작가 고 구본주의 15주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전시라 한다. 작품은 주로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아버지의 현재 혹은 과거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힘에 부치는 '삶'의 고단함이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들이었다.


우리의 아버지가 힘에 겨운듯 벽에 기대어 담배 한대를 꺼내고 있다(구본주 작).


동문모텔 II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바로 동문모텔 I을 만나러 갔다. 동문모텔 I은 동문모텔 II에 비해 외진 곳에 위치해 산지로(산지천을 따라 만들어진 도로)에서 쉽게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동문모텔 I은 지하 1층 지상 5층의 건물이다. 원래 이 건물은 최초 모텔 건물로 준공 후 병원으로도 사용된 건물이다. 아라리오 뮤지엄 측에 따르면, 1975년 최초로 준공된 이후에는 모텔로 사용되다가 1982년부터 1994년까지 덕용병원 건물로 활용된 바 있다고 한다. 병원 이전 후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새롭게 탄생하기 전까지는 한미여관이란 이름의 여관 건물로 사용되었다. 2014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멀리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따라서 아래에서 위로 찍게 되었다.


예전 건물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빨간 외벽만 보면 완성된지 얼마 안된 건물 같지만 곳곳에 역사가 새겨져 있다.


동문모텔 I에는 지하층이 있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나 어릴 적 많이 봐왔던 건물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지하로 내려가면 주로 다방이 있거나 당구장이 있었던 것 같다. 지하층부터 모든 공간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동문모텔 II에는 한 작가의 작품만 전시되어 있었으나 동문모텔 I에는 25명의 작가의 작품이 총 79점 전시 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매 층마다 관람의 재미는 더 컸던 것 같다.


모텔의 지하로 내려가는 길


하지만 작품 세계는 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전문적 지식도 없었고 여기에 전시된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기 쉽지 않았다. 어찌 보면 괴기하고, 어찌 보면 비장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인간 세계를 비틀어 놓은 듯한, 해석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그런 작품들이 지하층부터 5층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일부 작품을 보고 섬뜩함을 느껴 이날 밤에 자꾸 악몽을 꾸었다. 작가들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반드시 있으나 그런 이야기들은 꼭 내 해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와 가슴속에 이미지처럼 박히도록 의도한 것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모텔의 매트리스는 아닐테지만, 모텔이라는 공간에서 활용되었을 것 같은 메트릭스를 활용한 작품이다.
회화도 적지 않은데 해석하기 쉽지 않다. 해석이 불필요 할 수도 있다.


모텔에서 사용되었을 법한 화장실과 샤워실이다. 보존된 것인지, 작품인지 혹은 보존된 것을 활용한 작품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사실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예전 우리가 우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날 때 몸의 때를 씻어내고 피곤한 몸을 뉘었을 법한 아주 오래된 여관 건물이 그 자체로 작품이 된 것이니까. 정확성보다 가치로 읽어 내야 한다.


화장실도 작품이다.


모텔 방을 터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이 것 마저도 작품이 되는 곳이 바로 동문모텔 I이다.


후기
오래된 도시에서 역사적인 도시로


동문모텔이 자리 잡고 있는 산지로 일대는 흔적만 남아있는 제주 읍성과 과거 구도심의 상징이었던 동문시장 등이 있다.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어 주요 상권이 신도시로 이전한 1990년 초까지 이 지역은 제주시 상권의 중심이었다. 뭍에서부터 들어오는 물류의 관문과도 같았던 산지천은 많은 공장과 상가, 주택들로 사람이 늘 붐비는 장소였다. 하지만 신도시의 건설은 오래된 도시에게는 늘 그렇듯 재앙이었닼 도시의 빠른 '늙음'을 강요했다.


이렇게 이 지역 일대는 늙어버린 '오래된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늙은 도시로 머무르지 않고 도시의 재생을 위한 몸부림이 지금도 이어지는 듯하다. 구도심의 상징 동문시장은 이제 제주를 느끼고 싶은 객들의 필수 방문 공간이 되고 있다.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은 멀지만, 산지천 강변에 자리한 두 개의 빨간 건물은 이 늙은 도시에 역사적 가치와 품격을 입히고 있다. 연계를 통한 즐길거리도 충분하다.


제주의 속살은 관광단지나 제주의 삶을 담고 있지 않은 그 수많은 박물관을 통해 만날 길이 없다. 산지천 강변을 따라 바라보게 되는 낙후된 늙은 도시의 아픔은 관광단지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가야 할 길이 멀어도 이런 노력이 모여 어느 순간 이 지역을 뒤덮을 것이다. 역사적인 도시로 탈바꿈할 그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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