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내 대가리가 깨졌다
아프가니스탄 3년 차.
서로 다른 사무소에서 온 오퍼 레터 세 장을 가지런히 펼쳐 놓고 내 맘대로 프로듀스 101를 펼치던 것이 올해 2월이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봉 협상도 해보고, 결국 원하는 직무로의 이동만은 약속받았다. 취업 시장에서 나는 언제나 선택하는 입장이 아닌 선택 받기 위해 눈물의 똥꼬쇼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기에 쥐꼬리만한 협상력이나마 생긴 것이 그저 기꺼웠다. 물론 그런 좋은 날은 얼마가지 않았다.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다정하게 손을 꼬옥 맞잡고 하루 아침에 인도적 지원 예산을 시원하게 전체 삭감하며 업계 자체를 골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인도적 지원 업계 가장 큰 손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미국이다. 미국의 대외 원조 기관인 USAID 산하 BHA (Bureau for Humanitarian Assistance)는 인도적 지원을 전담하는 기구인데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수십 억 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 예산을 관장하던 곳이다. 물론 트럼프의 말 한 마디로 하루 아침에 문을 닫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 트럼프가 우리 사무소의 관짝 문까지 손수 두드려 닫아주었는데 수천억원 규모의 펀딩을 백지로 돌린 것은 물론, 이미 줬던 돈까지 싹싹 긁어 도로 가져가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유엔에 환불 원정대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가 유일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무소는 하루 아침에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
식량 지원에는 물류와 운송이 필수적이다. 일정에 맞게, 루트에 맞게 각 지역의 주요 창고에 식량을 미리 옮겨둔다. 또 식량이 저렴한 시기나 환율이 내려가는 기간에 맞춰 식량을 선구매하거나 현지 화폐로 미리 환전을 해두기도 한다. 그렇게 배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식량을 한 달의 유예 기간 동안 다 배급하던지, 아니면 돈으로 물어내야만 하는 미쳐버린 이지선다형 답안지 앞에서 대가리가 깨져버린 나는 그저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타게팅이라는 기묘한 업무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총 인구는 약 3천만명. 물론 유엔에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지원할 예산은 없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어느 지역이 식량을 우선적으로 배정 받을 것인지, 더 나아가 그 안에서 어떤 가정이 선정될 것인지를 추려내는 작업을 타게팅이라고 부른다. 시장 접근성, 기후, 농업 생산량, 산업 구조, 자연 재해 등의 요소를 분석해 사업 대상지를 선정하고 주민들과의 협의를 거쳐 수혜자 후보를 추리고, 수차례에 걸쳐 조사원을 파견해 이 가정이 정말 지원이 필요한 상황인지를 검증한 후 식량을 배급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무리 빨라도 6주에서 8주가 걸린다. 그 모든 과정과 절차를 사람을 순무처럼 갈아 넣어 한 달 내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끝내거나 돈을 토해내야 하는 돌아버린 오징어 게임이 하필 타게팅 오피서로 막 직무를 변경한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였다.
당연하게도 돈이 없으면 식량 배급을 못한다. 올해 예산이 다 날아갔으면 일이 줄어야 정상인데 왜 야근을 하냐고? 이제 다른 나라의 도너들한테 차례 차례로 싹싹 빌어야하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겨울은 혹독하다. 그 시기에 지원 규모를 어설프게 타협보면 굶주림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다. 야 너네 탈레반한테 식량 지원하는거 다 알고 있어.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대 봐. 너네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근거를 대보란 말이야. 그렇게 이어지는 야근. 야근하고. 또 야근하고. 오늘도 도너들한테 온 질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까 또 야근하고. 내일도 야근하고. 하필 이 미쳐돌아가는 시기에 팀장 부팀장 둘다 부재다. 이 미팅에 불려갔다가 또 다른 미팅에 불려갔다가. 여기서 치이고. 다른데서 또 치이고. 또 깨지고. 다시 야근. 다시. 다시.
여기에 더해 미국의 보수 언론사에서는 아프가니스탄 지원은 유엔 직원의 부정부패와 탈레반의 압력에 의해 횡령되고 있다는 기사를 팡파레처럼 쏟아부으며 여론전을 시작했다. 신문사는 아주 친절하게도 총칼을 든 무자헤딘 사진을 1면에 넣어 이제는 탈레반이 내 고등학교 동창에 깐부쯤 되는 관계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부패한 유엔 직원인 나는 그 시각 카불 한 구석에 위치한 사무실에 앉아 박살난 예산안에 맞추어 누군가를 수혜자 리스트에서 자르고, 또 자르는 일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었다.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0과 1의 데이터가 말하는대로 가차없이 지원 리스트를 줄여나갔다. 그 엑셀 파일의 줄과 열에는 내가 만난 적 없는 가정이 있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있었을테지만 그 수혜자를 계속해서 줄이는 것만이 지금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업무였다. 그렇게 타게팅을 마치고 필드에 나갈 때면 왜 우리 가정은 지원을 못 받는거냐며 내 손을 잡고 펑펑 우는 어머님들이 아주 많았다. 부르카로 얼굴을 전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눈물은 그 천 조각을 전부 적시고 얼룩지게 했다. 폭발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는 어떤 아저씨는 목발을 짚고 나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얼굴들은 뇌리에 선연히 남아 종종 그 눈빛과 떨리는 손이 떠오르는 날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프간에 온 첫 해에는 드디어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그저 들뜨고 행복했고, 그 다음해에는 업무에 적응해 소소한 성과를 내며 처음으로 보람이란 걸 느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쉽게 잠들 수 없게 되었다. 매일 잠들지 못해 시뻘건 눈을 하고 겨우 회사에 가는 날이 이어졌다.
서서히 고갈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나답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면서 직장 동료들에게 건네는 작은 농담이나 복도에서 만난 옆 부서 직원을 향한 희미한 미소 같은 아주 사소하고 당연한 일들이 점차 어렵게 느껴졌다. 두 세시간 밖에 못자고 일하다보니 도무지 고운 말이 안 나왔다. 끊어지기 직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전류가 흐르는 케이블 선처럼, 언제든 사람을 찌를 준비를 마친 날선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인내심과 분노의 임계치가 한없이 낮아지며 나는 점차 지랄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변해갔다. 이게 정녕 내가 그렇게 동경하고 꿈꿔왔던 일들의 종착역인가 싶은 의심이 숨 쉬듯이 밀려왔다. 식량 배급 마감 기한을 맞추려 하청 업체 조사원들을 압박하고, 왜 설문지 폼을 제대로 제출하는 간단한 업무를 하지 못하냐며 우리 아빠 나이 뻘의 직원들에게 대놓고 면박을 줬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자신이 아주 자랑스럽다가도 어느 날은 그런 내가 한없이 부끄러웠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수치스러워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나는 아주 조금 지쳤다. 어느 날 갑자기 해고장이 날아들어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짐을 뺄 수 있을 만큼만.
유엔은 고용 안정성이 개박살 나있는 조직이다. 애초에 사무총장부터 인턴까지 모두가 계약직이니 더 얹을 말도 없다. 나는 유엔에서 근무한 지난 5년 간 총 7번의 재계약을 했다. 수개월 단위로 조각 조각 쪼개진 계약서 속에서 어떻게든 내가 있을 곳을 찾고자 그저 필사적이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컴파운드 생활은 도저히 정상이라 부르기 어려움에도, 태어난 나라와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점마저 사소한 패널티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많은 인도적 지원 업계 종사자들은 이 일을 단순한 업무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덧 긴급 구호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라는 정체성은 자아를 구성하는 한 축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 기이한 자아의 위탁이 바로 모든 불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당장 3개월 뒤 연장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종이 쪼가리 한 장에 자아를 통째로 위탁하고 있으면서도 그 선연한 위화감을 애써 흐린 눈을 하고 모른척 해야만 하니까.
예산 삭감의 충격이 가신 후 계산기를 두드려 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이제 정말 돈이 바닥나기 직전이라는 것을 눈치챈 경영진은 곧바로 대규모 구조 조정에 착수했다. 조용히 사람이 잘려 나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해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하청 단체 직원이 가장 먼저 잘렸고, 그 다음으로 유엔 계약직이 잘렸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정규직도 잘리기 시작했다. 직원 개개인의 업무 성과는 썩 대단한 고려 사항이 못 되었다.
그래서 내가 짤렸냐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