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개발협력업계 구조 조정 시대에서 살아남기

by 최승지

트럼프가 신명나게 칼 춤을 추며 골로 보내 버린 인도적 지원 업계! 미국 펀딩 의존도가 큰 유엔 기구부터 점차 구조 조정을 시작해 수 년, 혹은 수십 년 몸 담아 온 직원들을 망설임없이 서걱서걱 잘라내기 시작했다. 유엔세계식량기구. 자랑스러운 우리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대대로 사무총장 자리를 은퇴 목전의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출신 정치인 혹은 정치인의 아내가 번갈아가면서 맡을 정도로 미국 펀딩에 뼛 속 깊이 충성해 온 기구이다. 식량 배급을 위한 유엔 전문 기구의 수장으로서 전문성이 있을리 만무한 정치인을 기용하는 것에 대한 옳고 그름은 일단 차처하고, 좌로 가든 우로 가든 식량 지원을 위한 자금만 많이 받아와 준다면 나는 누구에게나 감사의 큰 절을 올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이들 밥 먹이는 데에 개인의 신념과 자아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


우리 사무소는 지금껏 구조 조정을 최대한 미뤄왔다. 내심 올해가 가기 전에 정치권의 기적과도 같은 자비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다만 아프가니스탄, 혹은 탈레반, 혹은 미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두고 나온 값비싼 무기들과 건설 중이던 군사 및 비행 기지들은 그 자체로 미국의 역린과도 같기에 아마 우리 사무소는 이대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파산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았다. 자고로 인도적 지원 업계의 펀딩이란 누군가 얼마나 굶주리고 있냐가 아니라, 그 곳에 지정학적 중요성과 정치적 정당성이 있냐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올해 이 지난한 정치적 개싸움에서 그저 심플하게 그리고 아주 완전하게 패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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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조 조정의 막이 올랐다.


유엔의 구조 조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일을 열심히 하고 잘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일 잘 한다고 내 자리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일을 개 같이 못 한다고 해서 반드시 짤리는 것도 아니다. 애초에 열 명도 안되는 심사 위원회가 900명이 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를 일일이 파악해 2-3주 안으로 공명정대하게 구조 조정을 잡음 하나 없이 마친다는 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다. 결국 얼마짜리 직원을 얼마나 잘라내야 목표 금액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얼추 계산기를 두드린 후, 절감안에 맞춰서 일단 한 번 골라 찍어보는 지옥의 러시안 룰렛이 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한 편, 유엔엔 인건비가 압도적으로 비싼 직원 층이 정해져있다. 그 사무소가 위치한 나라에서 모집한 직원을 내셔널, 다른 나라에서 모집한 직원을 인터내셔널이라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사무소를 예를 들자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모집되어 아프간 국적을 가지고 있는 직원들은 내셔널, 그 외의 국가에서 모집되어 아프간 외의 국적을 가진 직원들을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른다. 직급에 따라 다르지만 인터내셔널 직원들의 연봉은 대체로 내셔널 직원의 평균 2-3배에 달한다. 기본급에 더해 생활비 지원금과 특수지 수당이 따로 붙기 때문이다.


자, 이제 누굴 먼저 잘라내야 할 지 아주 쉬운 답안지가 보일 것이다. 구조 조정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 명이 넘었던 인터내셔널 직원들의 절반이 순식간에 실직자가 되었다. 탈레반의 카불 탈환 이후 각 국의 대사관이 모조리 철수하며 업계 내수 취업 시장이 완전히 박살 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특수성과 일단 이론적으로는 본인들 나라에 돌아가 다시금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기회라도 열려 있는 인터내셔널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도 계산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내셔널이라도 정규직을 자르기엔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에 이번 구조 조정에서 비정규직이 집중 타겟이 된 것 또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굉장히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들린다. 나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싹둑 잘라도 뒷탈이 전혀 없는 비정규직 인터내셔널이라는 점이다.


따라해봐요. 잽잽 그리고 투.


그렇게 구조 조정을 심사하는 위원회 앞에서 각 부서의 인원 감축안을 발표하는, 각 부서 팀장들에겐 그저 지옥과도 같을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이미 현실의 지독한 억까를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돌아갈 짐을 쌀 마음의 준비를 마쳐가고 있던 내 앞에 기적과도 같이 나타난 한 명의 구원 투수가 있었으니, 바로 태국 출신인 M씨다.


우리 팀엔 곧 열반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살아있는 부처가 한 명 있다. 그는 기분조절장애, 분노조절장애,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불면증, 우울증, 알콜 중독 등 다양한 정신 질환이 난무하는 아프가니스탄 컴파운드에서 마음의 평안함과 젠(禪)을 유지하고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하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니터링 팀 팀장을 맡는다는 건 하청으로 고용된 수백 명 조사원의 다양한 인간 군상 드라마와 탈레반이 사사건건 개입하려 하는 상황을 디폴트 값으로 둔 채 매일 같이 터지는 수많은 트러블을 탁구공처럼 핑퐁핑퐁 처냄으로서 비로소 월급을 받는 걸 의미한다. 그는 이런 억까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대체로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얼마 전 탈레반이 나라 전체의 인터넷과 전화 및 문자를 냅다 끊어버렸을 때도 북한에서 근무하던 생각이 난다며 앞으로 일이 정말 재미있어지겠다고 실실 웃고 마는 무서운 인간이다.


이 구조 조정 심사 위원회 미팅에 아프간 발 급성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는 내가 나가봤자 도대체 이 단체는 실무자 말을 처 듣지를 않아요 수 분 간의 장렬한 극대노를 분출한 끝에 해고 당한다는 자멸 엔딩이 분명했다. 자고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그 일에 적합한 관대한 인격자가 맡아야만 하는 법이다. 나는 그의 대원경지를 굳게 믿으며 내 커리어적 생사여탈여부를 전적으로 이양한 후 구조 조정 건은 최대한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고자 노력했다.


그런 와중에도 나날이 깊어져가는 다른 부서와의 미묘하고 기이한 신경전에 머리가 아파왔다. 네가 안 잘리면 그 대신 내가 잘리는 걸까? 아니면 너도 잘리고 나도 잘리는 걸까?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공중으로 분해된 USAID의 3만명에 달하는 직원들과 이미 유엔에서 구조 조정으로 잘린 수만 명의 '전' 유엔 직원들이 끊임없이 취업 시장으로 유입되는 개발협력 업계 역사상 유례없는 불장에서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 5년차 햇병아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대체 얼마나 될까. 이번에 짤린다면 다시 취업할 때까지 몇 개월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등지고 이 존나 먼 타지에서 땀 흘려 일한 만큼 보답 받고 싶다는 헛된 희망은 애초에 가져선 안되는거였다. 그럼에도 가끔 지하에 위치한 벙커 체육관에 내려가 홧김에 샌드백을 존나 열심히 두들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으므로 체력 하나만큼은 오히려 좋아지는 것도 같았다.


모든 조정이 끝난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팀은 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팀과의 개싸움도 마다하지 않은 듯 했다. 결과만 말하자면 그는 모든 부서가 많게는 70%에서 최소로 잡아도 20-30% 인원 감축을 당하는 극단적인 구조 조정에서 사내에서 인터내셔널이 가장 많은, 즉 유지비가 제일 많이 드는 우리 팀을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살려내는 기염을 토하며 올해 구조 조정에서 완승을 거뒀다. 가히 무서울 정도의 협상력이었다. 혹시 뒤에서 심사 위원회를 협박했나? 남 모르게 뇌물을 먹인건가?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데이터를 다루는 우리 부서는 연구 목적으로 다른 기관에서 받은 공용 예산과는 별도의 펀딩, 그러니까 쌈짓돈이 좀 있었는데 이 돈을 사무소 전체를 위해 쓰는 걸 거부하고 나를 포함한 구조 조정 대상자의 계약 연장을 위해 쓰겠다고 경영진과 담판을 지은 모양이었다.


계약이 연장됬다. 물론 조건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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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나는 아직 우리 부서의 쌈짓돈이 버텨줄 마지노선인 내년 중순까지는 계약 연장 확정을 받았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당장의 상황을 지켜보고 미래를 준비할 시간은 번 셈이다. 전에 근무했던 사무소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돌아온 건 내 자리를 꽁으로 메꾸기 위한 대학생 자원봉사자 공고뿐이었다. 그래. 공짜 좋지. 근데 공짜 너무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니까. 곧 내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상사의 입이 아니라 직업 채용 사이트 공고로 뒤늦게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그걸 다른 직원들이 전부 돌려보고 있었다는 것은 단언컨대 직장인이 겪을 수 있는 여러 잔혹사 중 최악의 형태일 것이다.


요즘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을 받는 일이 많다. 우리 사무소에 난 공고 중 내정자가 없는 자리가 뭔지 물어본다거나, 구조 조정을 당했는데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없겠냐는 연락들이 대부분이다. 지금 내 대가리가 먼저 깨져서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이라는 것은 차처하고, 말단 중의 최말단인 나에게까지 연락이 쏟아진다는 건 그만큼 취업 시장이 꽝꽝 얼어붙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잘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도 했지만, 수많은 밤을 새워 쌓아 올린 신뢰가 없었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진심으로 싸워줬을까? 혹은 만약 계약 연장이라는 회사의 인정이 없었다면 눈 앞의 식량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고 좌절하던 시간은 영영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걸까? 도무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면서도, 때로는 한 평생을 바라온 꿈이 알고보니 사실은 허위 매물이어서 나를 대놓고 배신해도 나아가야만 하는게 인생인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둘러싼 상황과 감정 대부분이 흐릿하고 모호한 가운데, 오직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끈기와 성실함만으로 세상을 품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은 비단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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