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클레어 Oct 27. 2021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은 어떻게 대체불가능할 수 있을까

지금의 인문학


2020년은 아마 전 세계인 모두에게 지우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해였을 것이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2020년의 코로나"는 이미 시대를 가른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또 언급할 수밖에 없다.


2020년 이전까지 우리가 표준으로 알고 관행으로 알던 모든 것들이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너졌다.

그것도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질병은 휩쓸고 가면 인류문명의 역사에 큰 변혁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그것은 14C 중반 유럽의 흑사병 창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흑사병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인구가 흑사병 발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까지 200여 년의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200여 년 텀에 르네상스 시대가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하면 흑사병을 기점으로 유럽의 중세 세계관은 붕괴하고 근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유럽사에서는 시대 구분에 있어 중세 유럽은 암흑기고 근대와는 단절되어 있다는 단절론과 중세과 근대는 연속상에 있다는 연속론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연속론의 입장을 긍정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는 아날로그의 세계에 있는 데다 실제로 중세 말에는 서서히 근대로 갈 수밖에 없는 변화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모두가 변화를 이해하는 속도가 달랐을 뿐이고 흑사병은 다만 그 이해도를 공통적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도래는 중세 말 상황을 볼 때 필연적이었다.


인류의 욕망이 그렇게 향하고 있었다.






이렇게 흑사병을 돌아볼 때 코로나 시대를 맞이한 우리의 가치관이 붕괴하는 것이 당연하다.

돌아보면 놀랍게도 이미 우리는 대략 2015-2016년 무렵부터 제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6년을 돌아보면 그때 화두가 4차 산업혁명이긴 했지만 이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을까?


투자자들과 얼리어답터들은 가장 관심 있게 접근했을 것이고.... 대다수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다만 다른 기술들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이 "인공지능"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나저나 이세돌과 알파고 대전이 글쎄 2016년, 무려 5년 하고도 훨씬 더 지난 일이 되었다!

일단 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에 굉장히 호기심을 느꼈다.



내 기억상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사회에서는 논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혁신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표현은 그저 마케팅 용어이며 허상이다. 3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일 뿐이다.


아무튼 그것이 2016년의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그때부터 소위 지금 말하는 뉴 노멀 시대의 씨앗은 우리 세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씨앗에 대한 사람들의 체감도는 달랐다. 그건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 따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라는 이제는 특정 지역에 국한한 것이 아닌 "전 세계"를 강타한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이미 글로벌 시대에 전 세계가 연결된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변화의 씨앗이 세계인 모두에게 있었는데, 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무시무시한 존재는 세계의 연결망을 따라 전 세계에 퍼졌고, 전 세계 인류의 삶에 변화를 틔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뉴 노멀 시대였다.




코로나 시대를 규정하면서 초창기에 사람들은 과연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


중세 유럽이 흑사병을 겪으면서 근대로 전환하고 두 번 다시 중세의 가치관으로 돌아갈 수 없었듯이 마찬가지다. 코로나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본다. 보통 코로나 이전 시대라는 게 가치관이 아니라 마스크를 쓰지 않고 생활하는 그런 "생활양상"의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마스크 사용 여부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보자면 코로나가 끝나거나 위드 코로나 시대가 되어도 이제는 거의 공채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기업이 기존의 관행을 부순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굳이 공채를 하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관행을 깬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호기심에 해보고 싶어도 기업 같은 대형 조직의 입장에서 무모한 도전을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서 했는데 "어라, 이거 할만한데."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사라진 들 과연 이전의 채용시스템을 사용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비대면 시대를 맞이해서 인간을 많이 고용할 수 없으니 로봇이 상당히 발달했다. 로봇은 70년 이상이 된 기술이긴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특히 사람의 노동력을 쓰기 힘든 이 상황에서 도입해보니까 굉장한 효과를 냈다. 심지어 돈도 안 받고, 쉬지 않고 24시간 일한다. 이런 걸 경험한 기업의 입장에서 많은 수의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할까? 아니.



그럼 도대체 지금 70억 정도 되는 인간은 미래에 무얼로 먹고 살아가야 하지?

인간 삶의 이유가 대체 뭐가 될까?

인공지능 로봇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는 마당에 인간의 "창의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렇기에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것 같다.

생각이 많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했다는데, 진짜 웃긴 사실은 본디 인간은 "'생각'을 할 수는 있는데 '생각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다.


부에 대해 공부하면서 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고서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싶었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이 미래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지능에는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이 있다.

SF에 주로 나오는 것이 강인공지능이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생각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릴 때 떠올리는 인공지능의 형태이다.

약인공지능은 현재까지 나온 인공지능의 형태로 프로그래머의 명령어에 따라 움직인다.


대다수의 인공지능학자들은 "계속 인간의 지능과 뇌에 관해 연구하고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다 보면 강인공지능이 나올 가능성은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현존하는 인공지능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 " 하고 말한다.


결국 인간의 선택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이 강인공지능을 만드는데에까지 가면 디스토피아의 미래가 오는 것이고, 적당한 선을 지키고 과학적 윤리를 지킨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화와 인류의 번성을 가져오는 것일테다.



그렇다면 "예술한다는" 인공지능과 인간의 지능 그러니까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디에서 차이가 있냐는 의문이 들텐데 이 지점에 있다고 본다.


인공지능이 하는 글쓰기와 작곡, 그림그리기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데이터를 학습해서 조합하고 최적의 답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보자면 렘브란트의 작품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렘브란트의 화풍"을 모방하여 그대로 그려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과연 렘브란트가 자신의 화풍을 만들기까지 한 그의 고민, 생각기반, 철학, 사상이 담겨 있을까? 인공지능은 "렘브란트라는 한 인물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린 것일까??


언제나 최적의 답을 위한 계산은 할 수 있다. 챗봇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 챗봇 논란이 꽤 있다. 각종 윤리문제도 그렇지만 "인공지능의 대답"을 구성하는게 '우리 인간사회에서 많이 쓰이는 언어와 사고' 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의 언어와 사고를 데이터셋으로 쓰느냐에 따라 인공지능은 그것을 학습해서 프로그래밍 된 계산을 통해 최적의 대답을 하는 것이다. 인풋이 다양하지 않다면 인공지능의 대답도 적절하거나 혹은 예상 밖의 무서운 말을 하더라도 그 데이터를 넣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수준에서밖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셈이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은 다르다.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과 다른 까닭은 바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기 싫어하는데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원래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 "생각이 가능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이 사실이 지금까지 인간이 지구 상의 다른 종들과 달랐던 부분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 앞으로도 하지 못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표현을 하는데,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 건지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바로 '메타인지'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가. 왜 이말이 문득 떠오를까.

인공지능은 데이터만 완벽하다면 완벽하게 정답을 도출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인공지능 자신은 자신이 말한 그것이 과연 진정한 정답인지 '가치 판단'하지 못하고, 특히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없다. 인공지능은 '무지'를 모른다. 이것이 큰 차이점이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질문에 대해 답할 때 직설적이고 돌려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한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답이 무언지 생각하면서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대답을 한다면 그것은 개발자가 그러한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데이터 넣었던 것이지 일단 스스로 판단해서 한 것은 아니다.


반면 인간은 의사소통을 할때 상대의 의중을 "생각"하면서 그에 대한 대답을 '선택'할 줄 안다.

인간의 메타인지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성이다. 그리고 미래에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이 고유성을 잘 발휘해야 생각하는 기계들 곧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지 않을 존재가 될 수 있다.




4차산업혁명 핵심 기술들은 결국 "생각하는 기계, 기술"이다. 도구에게 "생각" 을 불어넣어보려는 노력을 하면서 정작 인간은 왜 더이상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알아야할 정보가 지나치게 폭발적으로 늘어서 그에 대한 피곤함으로?


인류 역사는 현재의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지금의 미래를 향해 달려 왔다.

몸으로 하는 노동에서 벗어날 자유. 이것에 대한 과거인들의 욕망의 미래가 현재 4차산업혁명 사회이다.


참고로 몸으로 하는 노동과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은 일하는 것에서부터의 해방을 그렇게 원하지 않는다. 일을 한다는 것이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몸으로 하는 노동이란 "인간의 생각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을 뺏어간다.


우리는 보통 생각이 많아지면 단조로운 행동을 반복하거나 몸을 움직이면 생각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그런 원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힘을 들여 혹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른 노동을 하면 그것이 기계와 차이점이 무엇일까? 심지어 그 몸은 기계만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점을 달리 본다면 인간의 몸 자체가 '몸으로 하는 노동'에 최적화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 원하든 원치않든 "생각하는 것" 이며 이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고 미래를 그려 나가는 것이라고 본다.



뉴노멀시대에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해야하는 공부가 무엇일까? 사고와 정보의 패러독스를 깨는 일이 필요하다.  일단 미래를 위한 공부와 공부 방법이 뉴노멀 이전의 방법과 달라져야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 공부는 바로 인간의 고유성을 갈고 닦는 공부, 바로 "질문을 제대로 하는 방법, 생각을 제대로 하는 방법"에 대한 공부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간은 왜 기술을 발전시켜왔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