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갖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일, 가볍고 단단한 미니멀리즘 지향
아침을 시작하며 문득 든 생각. ‘내가 지금, 이 줄에 왜 서 있는 거지?’ 늘 그렇듯 출근길 스타벅스는 북적였고,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그 혼잡함이 그날따라 유난히 낯설고도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커피 내리는 기계 소리, 뒤에서 들리는 통화, 매장 안을 가득 메운 목소리들까지. 그날의 모든 소음이 이상하게 낯설게만 들렸습니다. 테이크 아웃 블론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마저, 어딘가 맞지 않는 옷처럼 거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이언트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았습니다. 향에 끌렸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괜히 안심이 들더군요.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알았습니다. 이게, 캡슐 커피였다는 걸. 일본의 U사 제품이었고, 몇 초 만에 완성된 커피였습니다. 복잡할 것 없었지만, 아침에 필요한 감각을 또렷하게 건드렸습니다. 이 커피라면, 굳이 스타벅스를 들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은 충분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출근길의 루트가 바뀌었고,
하루를 여는 루틴도 자연스럽게 달라졌습니다.
아침의 리듬은, 그 한 잔을 중심으로 다시 짜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변화는 생활 전반으로 번져갔습니다. 커피 한 잔에서 시작된 조용한 감각의 전환은, 어느새 제 소비 전체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습니다. ‘이걸 굳이 써야 할 이유가 있었나?’ 질문 하나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왔고, 결국 도달한 결론은 단순한 절제가 아닌, ‘덜 원하게 되는 감각’이었습니다.
일본 주재원 파견을 준비하며 본격적인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짐을 싸다 보니 가져가지 않아도 될 물건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특히 신발장 앞에 섰을 때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글을 쓰며 떠올려보니, 운동화, 구두, 슬리퍼, 그리고 이제는 신을 일조차 없어진 군화까지 합쳐 대략 50켤레가 넘었던 것 같네요.
그중 어떤 걸 가져갈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기준은 명확했습니다. 용도, 드레스 코드, 컬러, 그리고 취향. 이 네 가지 축으로 하나하나 골라내다 보니 선택은 더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결국 남은 건 단 9켤레. 그제야 실감했습니다.
‘이게 지금의 내 삶에 필요한 전부구나.’
그 이후, 하나를 사면 하나를 비우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자, 변화는 생각보다 선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예전엔 손이 잘 가지 않던 신발 손질에도, 조금씩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구두를 닦거나 운동화 끈을 바꾸는 일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나에게 꼭 맞는 것만 남기고 나니 움직임도, 취향도, 상황에 맞는 선택도 조금씩 또렷해졌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 작가의 『나는 미니멀리스트 이기주의자입니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자극적인 제목에 이끌려 펼쳤지만, 뜻밖에도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았습니다.
냉장고 없이 살고, 하루 한 끼만 먹지만, 생산 활동에 필요한 체력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고가의 로봇청소기는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삶. 그 모든 결정은 절제가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그의 미니멀리즘은 ‘참는 법’이 아니라, ‘선택의 기준’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덜 갖는 삶. 그러나 필요할 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삶.
히메지 프로젝트로 장기 체류하며 머물렀던 호텔의 객실에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물건은 적었지만 필요한 모든 것은 갖춰져 있었고, 오히려 여유로웠습니다. 넘치는 풍요보다, 필요 없는 것이 없는 명료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더 깊었습니다. 그 감각은 서서히 제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습니다.
그제야 분명해졌습니다. 덜 갖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지가 더 중요한 일이라는 걸요.
그 기준은 제 생활 전체를 천천히 다시 짜기 시작했습니다. 신발 9켤레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삶의 리듬과 가치관을 바꿔 놓은 상징이었고, 불필요함을 덜어낸 자리에, 이전보다 훨씬 또렷한 ‘나 자신’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결정을 돌아보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덜 쓰게’ 되었고, 억지로 줄인 것도, 참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고 싶은 마음 자체가 줄어든 것이었죠. 예전엔 소비가 자연스러웠습니다. 즐겁기도 했고, 어쩌면 습관처럼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연함이 서서히 부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퇴근길, 무심코 들어간 마트에서 텅 빈 장바구니를 그대로 두고 나오는 일이 익숙해졌습니다. 그게 나를 덜 채우는 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채우는 일이란 걸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무언가를 손에 넣는 기쁨이 두 시간도 가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이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덜 갖는 삶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덜 원하지만, 더욱 나답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제가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게 된 방식이었을 겁니다. 예상하지 않았던 무지출로 인한 풍요는, 그저 따라온 결과였을 뿐이고요.
아참, 오해는 마세요. 덜 갖기로 했지만, 여전합니다.
필요한 건 가장 좋은 걸 고르고 있습니다.
경제 용어로 다시 읽는 오늘의 에세이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동일한 재화를 반복해서 소비할수록 추가로 얻는 만족은 점점 줄어든다는 경제 이론입니다. 소비의 빈도와 기대는 증가하지만, 감정의 반응은 둔화됩니다. 더 많이 갖는 대신 덜 원하게 되는 감각은, 이 한계효용의 체감을 몸으로 느낀 결과일 수 있습니다.
기회비용
어떤 선택을 함으로써 포기한 다른 선택지 중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을 의미합니다. 매일 들르던 커피숍 대신 캡슐 커피 한 잔을 선택했다면, 포기한 건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라 그 시간, 거리, 반복되는 피로까지 포함됩니다. 소비의 ‘덜함’은 다른 감각의 ‘더함’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합리적 소비
가성비를 따지는 절약이 아니라, 스스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는 소비 전략입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줄이는 행위는 ‘덜 갖기’가 아니라 ‘덜 흔들리는 기준’을 향한 실천입니다.
편익-비용 분석
소비를 결정할 때 발생하는 비용과 예상되는 이익을 비교하여 선택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비용은 금전만이 아닙니다. 줄을 서는 시간, 반복되는 피로, 선택의 피로감까지 포함됩니다. 합리적인 소비자는 지출보다 효용이 높은 쪽으로 결정합니다.
소비자 균형
소득과 가격, 효용 사이에서 개인이 가장 큰 만족을 얻는 지점입니다. 물건이 줄어들수록 취향과 상황에 꼭 맞는 것만 남게 되고, 그 선택이 삶의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자주 쓰는 것만 남긴다는 건 ‘생활 안의 경제적 최적점’을 찾는 과정입니다.
거래비용
물건을 구매하거나 소비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소요되는 시간, 노력, 불편 등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커피 한 잔을 얻기 위해 이동하고 줄을 서고 기다리는 모든 과정은 그 자체로 비용입니다. 덜 소비하는 것은 이 보이지 않는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정보비대칭
구매 전에는 알 수 없던 제품의 진짜 효용이나 한계를 구매 후에야 알게 되는 현상입니다. 반복된 실망은 ‘사기 전보다 산 후에 더 잘 아는 것’을 학습하게 만들고, 결국 더 적은 소비와 더 신중한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가치 소비
가격보다 기준, 양보다 질, 유행보다 지속가능성을 우선하는 소비 패턴입니다. 덜 사더라도, 필요할 땐 가장 좋은 것을 고르는 선택. 지출은 줄어들 수 있어도 만족은 높아지고, 삶은 오히려 더 단단해집니다.
소비 피로
선택이 많아질수록 발생하는 정서적 부담을 뜻합니다. 고르는 행위 자체가 피로가 되고,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거나 후회하는 소비로 이어집니다. 소비를 줄이는 건 때로 감정을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무형자산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시간, 리듬, 기준, 여백. 이 모든 것은 덜 소비한 자리에 남겨진, 가장 지속가능한 자산일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작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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