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다시 쓰이는 물건’의 조건
조폐공사가 화폐박물관 안에 굿즈 자판기를 설치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건, 이른 아침 포털의 짧은 기사였습니다. 파기된 지폐 조각을 담은 투명한 볼펜, ‘5만원어치 볼펜’이라는 말과 함께 소개된 문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한 자루에 지폐 한 장 분량의 조각이 들어 있고, 종류도 다양하다며 기념품용으로 제작되었다고 적혀 있었죠.
무심코 넘기려다 멈칫했습니다. 정말로 쓰기 위한 물건일까. 아니면, 그냥 기억을 소비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볼펜이라는 물건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위치에 있습니다. 어디서든 흔하게 나눠주는 물건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경우는 드뭅니다. 필요할 땐 늘 가까이에 있고,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 미련 없이 손에서 놓이곤 하죠. 그렇기에 기념품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어딘가 애매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가 조금 달랐습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조폐공사는 해마다 수백 톤의 화폐 부산물이 발생한다고 밝혔습니다. 인쇄 불량, 여백지, 유통 중 손상된 권종까지, 대부분이 폐기되어왔던 자원들이죠. 이번 볼펜은 그중 일부를 되살리는 첫 시도였습니다. 이름은 ‘머니 메이드’. 일회성 폐기물로 남지 않도록, 다시 쓸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어보자는 실험이었습니다. 출발로는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의도가 곧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방향도, 실제 손에 닿는 순간에 쓰이지 않는다면 의미는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볼펜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잘 써지고, 오래 쥐어도 손에 부담이 없고, 어느 상황에서든 자연스럽게 꺼내 쓸 수 있어야 하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서랍 속에서 조용히 다시 사라지는 운명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도쿄돔의 지붕을 감싸던 방수천이 서류폴더로 바뀐 일이 있었습니다. 이 소재는 단순한 천이 아닙니다. 도쿄돔을 비롯해 경기장처럼 기둥을 설치할 수 없는 구조물의 지붕에 사용되는 특수 텐트막으로, 높은 기압과 급격한 기온 차를 수십 년간 견뎌온 헤비 듀티 건축 자재입니다. 투광성과 난연성, 내수성까지 갖춘 이 소재는 도쿄돔을 30년 넘게 덮어왔으며, 건설 과정에서 많은 단재도 발생합니다.
업사이클 브랜드 ‘NEWSED’는 이 단재를 활용해 서류나 소품을 담는 케이스와 가방을 만들었습니다. 단단하고 반듯한 형태 안에, 처음 쓰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단지 디자인의 멋을 넘어서, ‘도쿄돔을 덮던 천막’이라는 상징성과 기능성까지 품고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이후 이 제품은 기업 굿즈나 지자체 홍보용으로도 자주 활용되었죠. 그저 예쁜 물건이 아니라, 일상의 한 켠에서 무게감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쌀 포대를 재봉한 가방도 있었습니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있는 CPI라는 회사는 지역 농산물 문구를 패턴처럼 넣고, 복지 고용 창출과 연결해냈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업사이클 기획인 줄 알았는데, 상공회의소 신상품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생각보다 멀리 가는 중이구나 싶었습니다. 지금도 축제 부스나 공공기관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이치현 니시오시에 있는 ‘UZUiRO’는 공장에서 남은 원단을 옷으로 엮었습니다. 셔츠의 솔기나 단추 배치 같은 사소한 디테일에서, 이 원단이 본래 어떤 용도로 존재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흔적이 오히려 오래 입고 싶어지는 감각을 남겼습니다. 2023년, 이 브랜드는 아이치현 환경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어떤 태도가 반영된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장면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 주변에도 분명 비슷한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가만히 되짚어보면, 이 물건들의 공통점은 ‘다시 쓰이는 것’이었습니다.
감탄보다 반복, 설명보다 감촉. 일본은 그 방향으로 꽤 오랫동안 실험을 이어온 듯했습니다. 흥미보다 생활에 남는 물건, 그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요.
재활용된 물건이 의미를 갖는 순간은 생각보다 명확합니다. 화려한 설명보다 튼튼한 박음질, 완벽한 기능보다 쓰는 사람의 손에 오래 남는 감각.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스며들었습니다.
돈볼펜은 그 출발점에서 얼마나 멀리 왔을까요. 지폐 조각이 들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오래 쓰이고 싶어지는 물건이 되기 어렵습니다. 볼펜이라는 본래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면, 이 물건도 의미를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손에 잘 맞고, 매끄럽게 써지고, 한 번 더 쓰고 싶어지는 감촉이 있다면 말이죠.
그렇게 계속 쓰이다 보면, 그 안의 지폐 조각도 어느새 ‘기억’이 아닌 ‘생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념이라는 말은 종종 물건을 정지시킵니다. 사용을 멈추고, 보관을 선택하게 만들죠.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말 오래 남는 건 ‘기억되는 물건’이 아니라, ‘계속 쓰이는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게 지폐 조각이든, 낡은 천이든.
바래진 원단이든 말입니다.
경제 용어로 다시 읽는 오늘의 에세이
업사이클링
한 번 쓰인 자원이 버려지지 않고, 새로운 쓰임을 얻어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오는 방식입니다. 단순 재활용이 아닌 ‘다시 쓰이고 싶은 물건’으로 거듭나야 비로소 그 의미가 완성됩니다.
자원 순환 경제
제품의 생산과 폐기 사이에 ‘다시 쓰는 과정’을 끼워 넣는 경제 구조입니다. 자원을 되살리는 과정 속에는 설계, 유통, 사용자의 선택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화폐 부산물
지폐 제조 중 발생하는 인쇄 불량, 여백지, 손상권 등 통용되지 못하는 자원입니다. 오랜 시간 소각되던 이 자원들이 이제는 새로운 용도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굿즈의 실용성
기념품이라는 이름을 넘어, 실제로 쓰이느냐가 남는 물건의 기준이 됩니다. 반복해서 꺼내 쓸 수 있는가, 그것이 굿즈가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 이미지 출처
한국조폐공사 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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