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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Apr 20. 2021

발효의 예술

오래전 김치냉장고 광고에서 '발효과학'이란 단어를 들은 적이 있다. 적절한 온도와 시간을 조절하여 미생물의 작용을 통해 유익한 것을 얻는 과정이 발효인데, 이 과정이 성공적이면 김치의 맛이 예술이 되고 더불어 몸에도 유익한 식품이 되는 것이다. 김치의 발효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술이 탄생하는 알코올 발효를 떠올리면 '아!' 하지 않을까. 어쨌든 언제부턴가 이 발효라는 과정이 생각하면 할수록 예술작품의 탄생과도 유사한 점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마음에 오래도록 아주 잘 품고 있으면, 그중 어떤 것들은 발효가 되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된다. 나의 관점에서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것들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효 과학'이 원재료나 미생물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온도와 숙성 시간이 필요하듯, '발효의 예술'에도 작가마다 서로 다른 방식과 과정이 필요하다. 작가들은 어쩌면 그 적절한 방식을 찾기 위해 평생을 고군분투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필자가 발효 예술의 대명사로 생각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기


하지만 과학과 예술에서의 차이점도 있는데, 그것은 발효가 잘 못되어 부패의 과정으로 갔을 때이다. 과학에서는 적절한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지 못해 부패로 진행되면, 그야말로 썩어버려 악취가 풍기고 유해해지며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서는 썩었다고 생각되었던 기억과 마음마저도 다시 발효의 과정으로 끌어드릴 수 있다는 점이 둘 사이의 큰 차이점이다. 주변의 예술인들이나 그리고 취미 미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 단순히 속에 있던 것을 끌어내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과 치유의 효과를 얻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도 의학 심리학자 융의 조언을 받아 신경증에 도움을 얻기 위해 그림 그리기를 실천했었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심신의 도움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되려면 내 속에서 부패하던 것이 발효가 되어 정화된 것이 자리 잡고, 거기에 적절한 기술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 해바라기 화단(1933) / 헤르만 헤세 | 클링조어 발코니(1931)

동시대에는 워낙 다양한 장르와 형태의 예술들이 존재하고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찰나를 담아내는 것들도 많다. 그것들이 잘못되었거나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오래도록 품어 속에서 발효를 거친 것들이 작품으로 표현되었을 때 더욱 깊이 있는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빠르고 거칠며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것들이 충분한 관심과 정성이 담긴 내적 발효과정 속에서 느리고 정적이고 조용하지만 훨씬 더 큰 힘과 에너지를 가진 것으로 서서히 변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가들은 즉흥적으로 영감을 주었던 것들부터 내 속에 돌보지 않아 썩어버린 것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이라 말할 수 있는 작품은 단순히 기술의 연마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을 갈고닦는 내적인 성찰과 더불어 기술의 연마가 있을 때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좋은 예술가가 되는 것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우환의 '선으로부터',  no.780123, oil on canvas, 130x163cm, 1978


현대 우화의 거장이라 불리는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의 한 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예술가들은 비난받을 우려를 무릅쓰고 지난한 창조와 기다림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뤄낸 예술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때, 예술가들은 열심히 양식을 모았던 타인들 못지않게 당당해진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가볍게 흘러가는 지금이지만 진실된 발효의 예술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고 예술가에게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앞으로 계속, 그리고 영원히.


레오 리오니, <프레드릭> 삽화 | 프레드릭은 책의 주인공인 시인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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