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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Dec 24. 2019

'당신, 서른은 넘겼을 것 같아요'

듣기 좋은 나이 듦에 관해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서른은 넘겼을 것 같아요'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나이 듦에 관한 대답이었다.




2017, 마드리드




약 2년 전에 나는 취미로 화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대게 3-4명의 학생이 함께 수업을 진행하였다. 내가 느끼기에 세속적인 많은 부분은 거의 내려놓고 진행되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수업이었다. 선생님의 학생이 된 지 거의 일 년이 되었지만 개인적인 신상에 대한 부분은 묻지 않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세대교체가 일어났다. 연령대가 조금 올라가고 유쾌한 수다스러움이 묻어나는 분위기로 전환이 되었다.


어느 날인가는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한 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나이를 묻게 되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혹시 불편한 사람이 있을까 선생님은 내키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도의 말을 던지셨다. 그러나 모두 자연스럽게 나이를 말하는 분위기에서 나만 빠지기는 참 어려운 노릇이다. 그리고 특별히 감출 필요도 없었다. 사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어쨌든, 어느 사이 분위기는 갑분 나이 맞추기로 돌아섰다. 한 학생이 먼저 선생님이 학생들의 나이를 맞춰보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가까이서 함께 그림을 그리던 어떤 이들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선생님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 음, 일단 서른은 넘겼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서른을 넘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여성인 나는 그때까지도 서른을 넘긴 것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순간 마음속엔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일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속엔 악의란 전혀 없어 보였고, 슬쩍 선생님의 옆모습을 보자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속으로 잠깐,  '뭐지, 웃으며 먹인다는 거 이런 거였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혼란을 틈타 또 다른 학생은 재빨리 '왜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선생님은 '분위기가 그래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을 듣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서른은 넘겼을 것 같아요'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나이 듦에 관한 대답이었다. 선생님은 한 명의 인간이자 여성이 세월의 흐름을 타고 지금까지 쌓아온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지 얼굴에 드러난 젊거나 늙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을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너의 분위기는 네가 충분히 성숙한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해,
 그래서 넌 내가 봤을 때 삼십 년은 더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은 그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 나를 30대의 여자로 봐준 것이 아니라 30년을 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인간으로 봐준 것 같아서. 그것은 내가 세월에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을 통해 얻은 것에 대한 이야기기도 했다.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 기분 좋은 대답 이외에도 그림을 그리는 방법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까지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되면 거기엔 선생님의 덕이 크다.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나는 올해 나만의 분위기를 1년만큼 더 쌓았다. 그리고 내년에도 지금처럼 나의 분위기를 차곡차곡 쌓으며 나이 듦의 기쁨도 느껴갈 것이다. 


2017, 그라나다



메리 크리스마스! 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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