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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Dec 26. 2019

고흐, 영원의 문에서

그의 내면을 따라, 끝까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아침을 구경하며 늦은 출근길 시간에 나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상영관에 입장할 때 SNS용 사진이라도 찍을 요량으로 입구에 걸려있을 포스터를 찾았지만, 아직 지난 개봉작 포스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사진은 포기하고 입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12월 26일 오전 10시 20분, 2층 작은 상영관에는 총 6명의 사람이 함께 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3-4편의 예고편을 보여줬다. '시동'과 '파바로티'가 기억에 남는다. '시동'은 정말로 내가 보지 않을 만한 장르이지만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배우가 이번 영화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의 결정이 옳았을 증거를 찾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다음 주 안에는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건 파바로티의 예고편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영화 파파로티에 이제훈 배우가 나오지 않았었나 싶다. 그래서인지 내레이션으로 그가 등장했다. 근데 들으라는 파바로티 목소리보다 배우 이제훈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 좋아하는 지점이 많은 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Vincent Van Gogh - At Eternity's Gate (영원의 문)


스크린이 묘사하는 청각적 자극과 시선의 떨림은 그의 내면세계의 표현이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이 표현은 계속되고 있고, 그것 때문인지 영화가 끝나고도 흔들리는 잔상이 오래 남아 있었다.


영화는 고흐가 동생 테오와 함께 보낸 파리 시절부터 시작된다. 복잡한 파리 시절, 짧은 고갱과의 만남. 그리고 막 도착한 아를의 겨울. 들판에 한 가득 미라가 된 해바라기.


숲과 들을 헤매다 멈춰 선 열린 풍경의 들판에서 한 참이나 자연을 관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뛰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허물없이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활짝 웃는 그의 모습. 나도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낀 동시에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넓어지고 있는 숨 가쁜 시간 속의 순간을. 그리고 벅차오르는 마음을. 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의 허공을 향한 기쁨의 미소를 알 수 있었다.

The Painter on His Way to Work, 1888, Vincent  van Gogh

고흐의 뒷모습이 나올 때마다 경쾌한 어조의 피아노가 흘러나왔다. 그의 씩씩한 발걸음을 느끼고 있자니 자꾸 그의 자화상 한 점이 떠올라, 나는 미소를 흘렸다. 흘린다는 것은 사실 넘친다는 것이다. 나는 항상 그 자화상에서 차고 넘치는 생기와 때로는 귀여움과 발랄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슬프지만 경쾌한 발걸음, 나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계속 그의 뒤를 따랐다.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격정적으로 흔들리는 시선과 때론 흐릿해진 시선을 보이고, 그리고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상처의 말들이 들려온다.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만 들게 하는 것들. 그는 여러 번 기억나지 않는 광기에 휩싸였다.


아를에서 쫓겨온 빈센트에게 테오는 이렇게 말했다.


' 형은 괜찮은 화가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야'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Vincent van Gogh



그리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가셰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세상에 줄 선물이 그림이라는 거군요'
The Starry Night, 1889, Vincent van Gogh


영화의 마지막 죽음을 향해가는 그의 힘겨운 발걸음에서 조용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테오와 가셰 박사의 말대로 되었다. 그는 위대해졌고,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었다. 마지막 상영관을 나오는 길에 포스터가 바르게 붙어있었다. 드디어 그가 붕대를 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우리에게 선물을 준 빈센트가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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