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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Dec 29. 2019

우연에서 만난 순간의 찬란

여행의 반성

바르셀로나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환기가 되지 않는 호텔방 덕분에 목이 칼칼했다. 언제나처럼 먼저 일어난 나는 누워있는 동생을 뒤로하고 샤워를 했다. 여행의 후반으로 접어든 지친 육신도 새로운 경험을 향한 호기심 어린 나의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동생에게 좁은 화장실 공간을 내어주고는 익숙한 음악을 재생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이자 가장 많은 날을 보낼 바르셀로나의 호텔방은 시내 중심가에 있어 최고의 위치를 자랑했다. 제대로 된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되지 않는 것만 빼면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최적의 호텔이었다. 동생과 나는 호텔에서 5분 거리의 람블라 거리(La Rambla)를 향해 걸었다. 아침이라 아직 거리는 한 산 했다. 어젯밤 도착한 바르셀로나에서 처음 마주하는 아침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별것 없는 거리에 별것을 찾는 나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빠르게 돌아가다 순간 낯익은 글씨를 발견했다. 오른쪽으로 보케리아(boqueria) 시장의 입구가 보였다. 재빠른 시선 교환과 발걸음으로 우리는 총총거리며 신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2017, 바르셀로나


안으로 들어서자 두 눈을 반짝이며 이곳을 더 깊이 느끼고 혹은 더 오래 기억할 만한 적당한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았다. 잠시 후 각자의 손에는 두 가지 과일이 혼합된 주스 한 잔씩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곧 시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별것 없네'.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는 아마도 이미 여행 계획 단계부터  그곳에 대한 너무나 많은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 보케리아에 도착하여 내가 경험한 것은 새롭고 낯선 것들이 아니라 이미 본 것의 확인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별것 없네'가 곧 '별로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2017, 바르셀로나


'여행 중 배가 고파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우연히 한 메뉴를 골랐고 그 음식의 맛을 보았을 때 천상을 느꼈고 후에 찾아보니 그곳은 미슐랭 쓰리스타에 빛나는 맛집이었으며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는데 우연히 내가 그곳에 절묘한 타이밍에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실제로 여행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그 경험 후에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저 위에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하나의 문장 속에서 나에게 가장 흥미롭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부분은 어디인가?


나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고 흥미와 의미라는 필터로 그것을 걸러내었다. 그리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이 '우연'과 '맛'이 남겨졌다. 나는 이 두 단어를 통해 내가 여행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뜻에 가까이 접근해보았다. 


나는 '연쇄계획마'라고 불릴 만큼 여행에 있어서의 계획을 중요시하는 타입이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얼마나 나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되었는지 재평가하며 내심 뿌듯해하곤 했다. 심지어 여행 중간중간에도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라며 자주 스스로를 격려하고 칭찬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란 것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모두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짜여진 것이었다. 더군다나 얼마간의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나는 또 다른 계획안에서 프로그램된 채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우연'이란 단어를 골라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날로그식 연쇄계획마의 면모


다시 던져진 문장으로 돌아가 보았다. 문장이 포함하는 다양한 가치와 의미 중에 나에게 남은 건, '우연'과 '맛'이었다. 나머지 것들은 결국엔 내 안에 남는 것들이 아니다. 아니, 처음부터 내 안에 없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자 생각은 내가 꿈꿔왔던 수많은 순간들이 내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여행이 나에게 무언가 얻기 위한 여행이었나, 혹시 애초에 버리고 잊기 위한 여행이진 않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했다. 


우연에서 만난 순간의 찬란, 계획되지 않은 경험의 아름다움. 나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세부적인 계획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를 떠나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유럽여행에서 한 장소에 대한 실패의 기억을 가지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여행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여행을 통해 나를 더 들여다보고 잘 알고 싶었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 개입되자 '나로부터 떠나는(출발하는) 여행'이 아니라 '나로부터 떠나버리는 여행'이 되고 말았다. 


2017, 바르셀로나


나는 이제 타인의 경험을 재탕하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다. 또한 타인이 보기 좋을만한 윤색한 사진을 찍는 여행도 그만 하고 싶다. 더 이상 자랑하는 여행이고 싶지 않다. 정말 나의 여행을 하고 싶다. 실패가 두려워 안전하고 성공을 보장하는 그런 여행과는 이제 안녕을 고하고 싶다. 적어도 여행에서는 성공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미 부여된 의미를 찾지 말고 스스로 부여할 의미를 찾는 여행. 비록 그것이 정말 보잘것없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 안에 만족감을 퍼트리는 여행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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