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톱에 자유를
나는 어린 시절 손톱을 짧고 정갈하게 깎는 것이 청결의 척도라 배우며 자랐다. 고등학교 무렵까지 손톱 검사라는 것을 받으며 자랐고 대학교 시절 남자 친구에게 손톱깎이를 선물 받기도 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앞의 두 문장을 썼지만 사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내가 손톱을 잘 깍지 않는 혹은 짧게 깎지 않는 이유에 대한 변명에 관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손톱을 깎은 후 느껴지는 불쾌함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감추어져 있어야 할 생살의 살갗이 벗겨지며 세상에 드러나버린 느낌과도 같은 것이었다. 손톱을 자른 후 짧게는 하루 혹은 며칠 동안 나의 촉각은 온통 그 벗겨진 살갗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나는 나 이외의 모두들 그렇다고 생각했고 다들 그런 불쾌함을 감수하며 착하고 참을성 있게 손톱을 깎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사실은 대학시절 남자 친구와의 대화에서 알게 되었다.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가끔 학회에 다녀올 때면 선물을 사 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토토로 손톱깎이를 사 온 것이었다. 귀여운 모양에 전용 플라스틱 주머니까지 딸려있는 모양이 맘에 들어 웃어 보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선물의 의미가 있는 듯했다. 그가 손톱깎이를 꺼내 내 손톱을 잘라주려 할 때 넌지시 물었다.
"내가 손톱을 잘 안 깎아서 이걸 사온 거지?"
"응, 예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진지하게 손톱깎이의 불쾌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처음 했던 말과는 달리 길이의 여유를 두고 마저 손톱을 다 잘라주었다. 나는 물었다. 그도 나만큼의 불쾌함을 참아가며 손톱을 자르지 않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사라진 손톱으로 약간 낯선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언제나 짧은 손톱의 그는 두 손가락으로 좁아진 나의 미간을 펼쳤다. 그리고선 그렇다고 해도 손톱이 너무 길면 안 된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생물학도였다. 그래서 그의 손톱과 나의 손톱을 꼼꼼히 비교하며 두 형질 간의 차이점과 그 차이점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 애써보았다. 내가 알아낸 것이라곤 그의 손톱이 편평한 반면 나의 것은 둥글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았지만 갑자기 진화의 주제로 들어가면서 서로 내가 더 진화된 생물임을 주장하는 이상한 결과만 낳았다.
그리곤 30대의 내가 된 어느 날 동생과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다. 동생은 함께 여행을 가는 기념으로 젤 네일이란 걸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손톱을 가꾸는 일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매니큐어만 칠해도 손톱에 자꾸 뭐가 붙어있는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행에서 찍은 사진에 단정하고 깔끔하게 색이 입혀진 손톱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러겠다고 했다. 여행은 즐거웠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손톱이 길어지자 관리받은 손톱이 위로 쑥 하고 올라가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동생에게 물으며 손톱을 나란히 비교해 보았는데 내 손톱이 두배는 더 빨리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듯, 나는 좀 예민한 구석이 있는 편이다. 나 스스로는 좀 이란 표현을 썼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아주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가 손톱 깎는 행동에 불쾌감을 느끼는 와중에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자주 해야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러한 나 자신을 오로지 손톱을 깎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하여 돌보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 손톱에게 아주 큰 자유를 주고 있다. 스스로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때까지는 깎지 않으며, 그 길이도 아주 여유롭게 조절하였다.
나는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의 손톱에 대한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