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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Jan 12. 2020

이히 리베 디히

독일 가곡 마스터의 로망

내 머릿속에는 나 조차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무용한 버킷 리스트들이 가득하다. 그중엔 독일 가곡 하나를 끝내주게 외워서 완창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이 버킷리스트는 이미 어느 정도는 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은 작곡을 전공하신 분이었다. 학교에서 지정한 음악책을 교육하는 것 말고도 늘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싶어 하셨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린 영화오페라와 발레 공연 영상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독일 가곡과 이탈리아 민요곡도 가르쳐주셨다. 최신의 것을 숭배하고 낡은 것들에 늘 비웃을 준비가 되어있는 장난기 가득한 10대 소녀들에게 이해받기 힘든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늘 싫은 척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 사랑했던 것을 다시 꺼내 읽어보고 올해는 그것을 불러보겠다고 결심한다.


곡은 이미 정해두었다. 베토벤의 'Ich Liebe Dich'. 거의 열여덟 해 전, 고등학교 때 배운 노래지만 아직 가사를 기억하고 있다. 신기하다. 그 시절 배운 영어 지문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걸 기억하고 있는 건지. 사실 엉터리 발음이긴 하지만 낯설기 짝이 없는 이 독일어 가사를 기억하고 있고 심지어 그때 함께 배운 이탈리아 민요 '오 솔레미오'도 외우고 있다. 이 두 곡은 당시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이 노래들이 뭐길래 나의 삼십 대 중반에 다시 꺼내게 된 것일까? 해답을 알 수 없어 일단 그냥 불러보기로 한다.


노래를 부르자고 생각하니 먼저 샘플이 있어야 한다. 다시 나의 간지러운 10대 후반을 소환해 보았다. 적당한 인물이 떠올랐다. 임형. 나는 그 음악가를 어느 순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임형주. 그를 그렇게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단순히 이름을 줄여 부른 건 아니고 형과 동생 할 때 그 형의 의미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하기 싫은 공부와 정말 하기 싫은 공부들로 가득했던 나의 십대속에 하고 싶은 것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그 한 켠에 임형의 노래가 있었다.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Over the rainbow'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버스 안에서 그리고 정류장에 내려 걸어가며 내가 건너갈 무지개와 그 너머를 생각하며 슬프고 기뻐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시 그때의 노래를 재생해 본다. 그의 미성이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 걸었던 그 길, 메고 있는 책가방의 무게, 괜히 크게 쉬어보는 숨. 임형의 음악과 나의 기억이 공존하는 세계가 있었다. 아주 오래 잊고 있었지만.


이제 임형이 나의 독일어 가곡 선생님이 되어줄 것이다. 십 대의 철없고 생각이 많던 소녀는 없고, 대신 철없고 생각만 많은 삼십 대의 내가 있다. 그런 나에게 임형이 처음 가르쳐 준 것은 'Ich'에 대한 것이다. 'Ich'를 소리 낼 때는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공기를 마지막까지 정확하지만 부드럽게 뿜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훌륭하고 만족스럽게 표현하려면 아직은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훌륭한 스승을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는다.


임형, 잘 부탁해요.

 

올해는 이 무용할 것 같은 버킷리스트에 빨간 줄을 그어 그 유용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꼭.



2016, Wien Opera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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