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모든 것은 결국 나이고 내가 아닌 것이다.
요 근래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나는 한편으론 매우 조심스러웠고 또 한편으론 부끄러웠으며 또 한편으론 자만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때 미처 다 읽지 못했던 싯다르타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은 싯다르타를 읽는 것이었으며 또는 헤세를 읽는 것이었고 그리고 나를 읽는 것이었다.
싯다르타.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나오는 싯다르타는 '고타마 싯다르타' 자체는 아니다. 이 책에서 '고타마'는 붓다,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아들로 각각 분리된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깨달았다.
싯다르타는 자기의 곁에,
고향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싯다르타는 이미 자기를 떠났다는 것을.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내가 최초로 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겠다고 생각 한때는 한참 자아가 성장할 중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이제 내 인생은 내 의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중학교 초반 시절 꽤 먼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했는데, 특히 하굣길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젠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되는 거야, 아무도 나에게 간섭할 수 없어'. 아주 호기롭지만 실상은 모든 부분을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학기초에 전달되는 학부모 모임 통지서를 전달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제때 드린 적이 없었다. 늘 어머니가 물어보면 마지못해 전해드리는 식이었다. 그리고 한 번은 어머니가, 도대체 왜 학부모 모임 통지서를 가져오지 않냐고 물어봤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학교는 내가 다니고, 공부도 다 내가 하는데, 부모님이 왜 오셔야 되는데!"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싯다르타의 아버지가 느꼈을 그 감정을 느끼셨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 궁극까지 괴로움을 겪어 해결되지 못한 모든 것은 다시금 되돌아오게 마련이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똑같은 번뇌를 겪게 마련이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전까지 늘 나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었다. 속에서는 온갖 불안과 불만과 화가 불덩이가 되어 까맣게 나를 태우고 있는데 그 속은 모른척하고 늘 겉만 윤이 나도록 닦았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내가 중요했다. 그렇게 아주 오래도 버텨왔다.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사실 때라고 하니 짧은 찰나의 순간처럼 생각될 수도 있는데 그 시기는 꽤 길었다. 그리고 그 몇 년간의 시간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고 지금의 나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내면의 소리를 따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30년 넘게 노력과 정성으로 가꾸어 놓은 나를 한 순간 부정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해 파종을 준비하듯 다시 그곳을 갈아엎고 돌을 고르고, 예전에는 꽃으로 가득했던 그곳의 황량함을 보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죽을 만큼 두려웠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의 허무함과 절망감에 몸서리친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가 없이 이 순간도 이 깨달음도 오지 않았을 것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 격정의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이제 또 다른 격정의 시간들과 매 순간 마주치고 있다. 그리고 내가 땅을 다시 갈아엎고 새로운 종자를 파종하긴 했지만, 땅속에 과거에 내가 뿌렸던 잠자고 있던 종자들이 새로운 것들과 함께 조화를 이뤄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단 한순간도 의미 없는 시간은 없었다. 내가 죽음을 생각했던 그 시간조차 이제 꽃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그 꽃들을 바라보며 나의 어리석음에 웃음을 띄우고 다시 땅을 갈아엎게 될 날을 고대한다.
사실상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든가 희생하든가,
자기를 망각하고 타인 때문에 사랑이라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
이 사랑,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은 번뇌요.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임을, 이것이야말로 윤회요, 흐린 근원,
어두운 물임을 그는 충분히 느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필연적인 것이고,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는 것임을 느꼈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내가 싯다르타를 읽으며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아주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던 지점은 싯다르타에게 아들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나는 늘 저 처음에 써 내려간 문장과 같이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필연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모님이 지금껏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또 한 번 나는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지 모른다는 강한 추측과 두려움이 생겨났다. 사실 나는 그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할 줄 알기에 그래서 내가 나를 어떻게 버릴지 알기에 아주 극렬히 그것에 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이 그것이었다. 영화 'A Late Quartet'에서는 냉정하고 차가 워보이는 그러나 실력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에 대해, 누군가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란 식으로 이야기하자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반대야, 마음을 온통 바이올린한테만 줘서 그렇지"
내가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랑은 지금 온통 어디에 가있는 것일까? 이것은 싯다르타가 걸었던 길처럼 어떤 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를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짜 두려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끝까지 속이며 지금 나의 부모님이 갖고 있는 위대한 깨달음과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될 것에 대한 것이다. 사랑이란 언제까지나 나에게 번뇌의 대상일 것만 같다.
도대체 어찌 그가 사랑을 모르실 리가 있겠나?
모든 인간의 존재를 무상하다고, 무(無)라고 간파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고 수고스러운 생애를
오로지 중생을 구원하고 가르치는데 바칠 만큼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신 그가 말일세!
나는 말씀이나 사상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행위 속에서, 삶 속에서 그의 위대함을 보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고타마(붓다)는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깊이 알고 깨달았지만 그 단어를 말로써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사랑을 말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사실 궁극의 가치는 결코 말로 가르치고 깨닫게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말하지 않지만 의미하는 무수한 설법과 가르침 속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제자는 그 순간 훨씬 깊은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싯다르타였다. 나는 과연 싯다르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려면 누군가 나 모르게 나의 아이를 낳아주어야 할 텐데.
새벽에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책을 펼쳐 아침이 다 되어 마지막 장을 넘겼다. 샤워를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 세상 모든 것이 붓다였구나'
'아모르파티'라 여기며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두가 부처이자 싯다르타라는 사실. 그러니 나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모두 깨닫고 또한 존중받을 자라는 것을 말이다. 나를 찾기 위해 싯다르타를 읽었지만 결국 나는 타인도 또한 나라는 것 그러니 모든 것은 결국 나이고 내가 아닌 것이라는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건방지지만 이런 생각도 했다.
'헤세가 어쩌면 나에게 피스토리우스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