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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Aug 10. 2018

12. 놀이는 자연인가 문화인가?

놀이는 예기치 못한 돌발사태에 대한 연습이다.  Play is training for the unexpected. 

––Marc Bekoff. Contemporary American biologist 


호이징가가 『호모 루덴스』에서 서술한 바에 따르면 놀이는 문화 이전의 것이다. 문화 대 자연의 이분법 자체가 약간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문화 이전 단계를 자연이라고 한다면 놀이는 자연이다. 인간 이외의 동물들이 나름의 놀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 놀이가 순전히 본능에 의한 것은 아니다. 분명 놀이는 자연이다. 그러나 자연에도 ‘문화화된 자연’이 있고 ‘날 것의 자연’이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설픈 분류일 따름이고, 문화와 자연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동물의 세계는 날 것의 자연인가? 믿기 싫어할 사람이 많겠지만, 동물의 세계에도 문화나 학습에 의한 전달이라고 할 만한 측면이 있다. 고구마를 씻어먹는 일본원숭이 이야기는 동물의 문화적 학습 능력에 관한 유명한 사례이다. 100마리 째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먹자 북해의 모든 원숭이들이 다 새로운 고구마 세척법을 학습했다는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라지만 동물들이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행동방식을 개발하고 전하며 배운다는 것은 확실하다. 

약간 다른 예로 인간의 여러 능력이 발달하는 데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 중에서 어느 쪽이 우세한가를 따지는 ‘자연 대 양육 논쟁’은 오랜 기간 동안 이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저쪽으로 기울기를 반복해왔다. 가까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도 당대의 현대과학은 최신 성과를 들먹이면서 역시나 자연·유전의 우세와 양육·문화의 우세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나 21세기 현대과학은 논쟁 자체를 무효로 평결한다. 자연(유전)과 문화(환경) 사이의 경계를 세우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무수히 겪게 되는 아주 우연하고 사소한 대화나 만남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사례도 많다. 평소 좋아하던 이성이나 성인이 ‘너는 참 그림을 잘 그리는 구나’라든가 ‘넌 뭘 할 때 참 특이해’라고 아무 생각 없이 건넨 한 마디 말 때문에 인생이 바뀌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우연적인 요소는 환경이라고도 할 수 없고 유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자연 대 문화라는 구도 자체가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이라 새로운 통찰이 나올 가능성이 없다. 그렇다면 좀 다른 구도를 짜서 현실을 바라보자. 우선 편의상 1차원과 2차원 그리고 간차원(間次元)이라는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이용하겠다. 

1차원적이라고 하면 마르쿠제를 떠올려도 좋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자고 번식하고 등등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종들이 하는 행위를 1차원적 활동이라고 칭하자. 2차원적 활동은 고도의 지능, 정서, 언어가 매개가 되어 인간만이 그리고 인간끼리 주체와 대상이 되는 활동을 칭하자. 놀이는 과연 어디에 해당이 될까. 동물들도 하는 행동이니까 1차원적인 측면이 있지만, 인간의 놀이 대부분은 또한 2차원적 활동에 귀속되는 측면도 허다하다. 바둑이나 장기같이 동물들이 자연스럽게 할 리 없는 순전히 2차원적 활동에 속하는 놀이도 있지만, 1차원적 행동을 수반하는 놀이에서 흥·신명·파이디아가 밀도 높게 분출된다. 따라서 놀이는 1차원적 행위과 2차원적 활동 사이 어딘가에서 존재하는 간차원적 활동이다. 그렇다면 오직 놀이만이 간차원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간차원적 활동이란 술어가 가능하다면, 인간의 활동 범주 중에서 놀이 말고 다른 무엇을 그렇게 칭할 수 있을까? 간차원적 활동이라 할 만한 것이 놀이 이외에 무엇이 있건, 혹은 놀이만을 간차원적 행동이라 칭하건 간에, 인간의 본질을 묻고 답하는 이들에게 간차원적 활동이라고 할 만한 인간의 어떤 특성이나 측면이야 말로 그 질문과 답을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놀이를 간차원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놀이와 무관한 놀이 외부에서 찾을 수 있지만 놀이의 내부에서도 차원을 넘나드는 특징이 존재한다. 우선 놀이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좋은 융통성을 가진다. 이런 특징을 가리켜 놀이의 비선형nonliteral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다 저거다 단번에 일도양단하기 어려운 속성이 놀이에 있다. 예를 들어 케이크를 먹으면 내 몸 속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먹지 않았다면 케이크는 냉장고 속에 있다.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어 놓고 먹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놀이에는 이거다 저거다로 가를 수 없는 묘한 영역이 있다. 예를 들어 놀이에서 규칙과 향상이 강조되는 측면을 루두스라고 하며 놀이에 흠뻑 빠진 놀이자의 신명과 흥을 강조할 때 파이디아라고 한다. 놀이는 루두스와 파이디아 둘 중의 하나로는 설명이 안되며 이 중간계 어딘가의 간차원에서 무한한 놀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나 놀이의 간차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 과정의 복잡성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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