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중략)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이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지니.
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성스런 긍정이다.
네오테니는 진화의 어떤 방향을 이르는 생물학 용어이다. ‘유형성숙’이라고 번역하는 네오테니는 어떤 생물종이 어렸을 적의 형태 즉, 유아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어른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진화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은 ‘약육강식’이나 ‘강자존’등의 틀에 박힌 통념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은 그와 정반대이다. 현실은 무척이나 역설적이고, 현실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론도 그만큼 역설적이다. 크고 강한 것들이 멸종할 때 오히려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결국 살아남는다! 환경의 변화가 급격할 때 어떤 생물들은 나이가 들어 몸이 커져도 유아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빙하기와 같이 먹이를 구하기 힘들게 됨에 따라 생존이 극도로 어려운 시기가 닥쳤을 때, 체격이 크고 강한 생물들은 오히려 멸종하기 쉬웠다. 수 백만년 전 빙하기에 실제로 괴수같은 체격과 힘을 가지고 예리한 칼과 같은 이빨과 손톱을 가진 수많은 육식동물들은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되었지만 오히려 작고 약한 동물들은 생존할 수 있었다. 환경 변화를 맞이하여 효과적으로 생존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생물종들은 덩치를 줄여서 먹이를 조금만 먹어도 되어 적응하기 쉬웠다. 이와 같이 어린 형태의 육체를 가지고 어른이 되어서 그 덕에 환경에 적응을 더 잘할 수 있었던 진화의 방향을 네오테니라고 한다.
인류가 수 백만년 동안 네오테니의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은 고생물학등 여러 학문에서 이미 밝혀내어 이제 와서 무슨 수를 써도 부정하거나 뒤집을 수 없다. 다만 인류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몇 번이나 그 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인간의 몸은 유인원의 태아나 영유아와 같은 특징과 모습을 지닌다. 어미의 뱃속에 있는 침팬지는 몸에 털이 없고, 이족보행에 적합한 골격을 가진다. 인간과 침팬지의 태아는 그 외에도 수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약간만 부연하자면, 인간이 고릴라나 침팬지 등 사촌과는 달리 몸에 털이 거의 없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도 분분하고, 인간의 두개골과 척추와 연결이 이족보행에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을 해명하기 위한 가설도 마찬가지로 허다하다. 그러나 두 가지 점을 동시에 설명하면서도 과학적 엄밀성과 근거의 확실성을 잃지 않고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현재 네오테니설 외에는 없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분명 네오테니를 여러 차례 겪었고 그 과정에서 겪은 신체적 변화는 화석이라는 증거로 남아있다. 그러나 성격이나 성향 등 화석에 남지 않는 다른 면, 즉 신체적 특성이 아닌 다른 특성 또한 네오테니를 겪었는 지는 밝히기 어렵다. 다만 수많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인간종이 다른 영장류에 비해 좀더 사회성이 유다르며 이 특성이 네오테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얻기는 했다. 한 집단을 이루는 개체수가 많은 종은 간단히 말해서 사회성이 높은 것이고, 사회성이 높은 종일수록 네오테니의 경향이 강하다. 반대로 네오테니의 경향이 약한 종은 사회성이 낮다. 사회성이 낮다는 것은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수컷들이 서로 혹은 약한 개체에게 가공할 폭력을 사용한다. 따라서 개체수가 많은 집단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러한 사회성은 네오테니의 부산물이지 목적은 아니다.
만약 우리 인간의 정신적 특성도 네오테니에 영향을 받았다면,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 놀이와 가장 높은 친연성을 가지는 종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어린 것은 놀이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놀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의 어린 것과 인간은 마냥 놀기도 한다. 또한 성인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지내는 사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아이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진화론자와 심오한 사상가들은 공통적으로 어린이와 놀이에서 뭔가를 찾는다. 사람의 사람된 소이연과 소유연이 놀이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