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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학교의 위기를 넘어 :

교육은 잊으란 말입니다 


근대의 교육은 발생부터 정치공학의 산물이며 투입산출 모델의 경제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신에 놀이는 근대를 거치면서 변형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관계와 생성의 구조를 가지는 장치이다. 

학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불과 10년 전이나 20년 전과 비교해 봐도 새로운 문제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 사이에 학교 내부와 외부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부정적인 경우도 많았고 바람직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 변화들의 와중에 새롭고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일어났다. 그 문제들을 일러서 공교육위기나 교실붕괴라 하는 이들이 있었다. 현실의 문제에 딱지를 붙이기 보다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 많았는데 이름을 그렇게 정해놓고 난 이후에는 모든 문제들이 학교 안에서 교육과 관련된 문제로 되고 말았다. 진단이 엉터리면 당연히 처방도 엉터리가 되는 법이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문제들이 학교에서 발생한 것인지, 학교 밖에서 생겨난 문제가 학교에서 발현된 것인지 제대로 따져야 한다. 학교 시스템이나 교사의 역량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교사와 학교가 매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매스미디어나 정책담당자들은 학교의 위기를 ‘학력저하’나 ‘공교육 붕괴’라는 담론으로 포장하길 좋아한다. 문제가 드러난 곳이 학교니까 학교를 개혁하건 혁신하면 사태가 나아지리라 말한다. 물론 학교 밖의 여건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람도 많다. 학생들이 학교를 통과하여 나아갈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이들은 말한다. 현재의 한국사회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고 그 중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모두들 말들이 다르다. 모두들 생각이 다른 걸 국론분열이라고 할 순 없다. 그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이들이 학교로 들어오기 전에 거쳐 오는 어떤 시공간과 그리고 방과 후에 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시대착오적인 공교육 시스템과 교육의 극히 일부이어야 하지만 오히려 전체 교육체계를 쥐고 흔드는 대학입시의 ‘웩더독wag the dog’ 현상을 모두 알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관료체계 안에서 일개 나사못 취급을 받으면서 무기력을 강요 받는 교사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사적 영역인 가정의 문제와 학생들의 변화도 문제의 현상을 복잡하게 만든다. 본고는 어린이들이 성장하는 여러 환경 가운데 또래집단 안팎의 동역학이 사태를 설명하는데 더 타당한 틀을 제공해 준다고 전제한다. 

위기라는 말을 참 많이 하게 되는데, 진정한 위기는 따로 있다. 학생들의 실상을 보는 이들이 무척이나 드물고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려는 사람들은 더욱 드물다. 부모들은 전체를 볼 기회가 없다. 자신들의 자녀만 개별적으로 보게 된다. 교사들조차 실상을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념에, 예를 들어 학교의 기강 등등에, 투사해서 보는 경우가 많다. 간단히 말해서 허상만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허상만 보고 모든 걸 재단하며 판단하는 사람들, 그리고 과거의 사례, 원칙, 제도, 예산만 가지고 학교와 학생을 주무르려는 교육담당 정책 입안자들이 존재한다. 그 반대쪽에 그리고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니 맘대로 살아라.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세상을 다 가져라. 너는 소중한 존재다. ······ 그러므로 혹은 그럴려면 우리 브랜드 제품을 사라!”라고 웅변하는 마케터들이 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삶의 지침은 이제 마케터들이 모두 제공해 준다. 마케팅 메시지는 온갖 예술적 수준의 광고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의 뇌수를 융단폭격한다. 교사들은 마케터들과의 싸움에서 이미 오래 전에 졌다. 그런 싸움이 있었는 줄도 모르는 교사들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교사들도 있다. 교사들은 졌지만, 학생들은 아직도 혼란스럽다. ‘살면서 배워 나가는 삶의 원리와 미디어와 광고에서 보여주는 원리들이 이렇게나 다른 데 나는 어쩌면 좋을까?’ 학생들의 가치관 세계는 본격적인 전쟁터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스승과 부모의 말씀을 참조하긴 한다. 다만 어른들의 시선이 미치는 곳에서는 그 말씀을 위반하는 위험을 피할 따름이다. 그냥 그 정도뿐이다. 세라비!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뭐.) 

질문 하나. 수많은 교수법이 현란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자신만의 우월성을 과시한다. 조기교육이 붐을 넘어 시대의 상식이 되면서 아동들이 인지적 학습을 시작하는 시기도 매우 빨라졌고 공부하는 양도 매우 많아졌다. 그런데 왜 갈수록 ‘학습부진아’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늘어날까? 물론 어느 정도 착시 현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십대 비율이 몇 년 전 97%가 되었다. 20년 전만 해도 ‘학습부진아’라 불릴 가능성이 높은 중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두들 공부타령을 하는데 몇몇 과목은 한 해가 다르게 새로운 교수법이 적용된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에서 교육에 들어가는 재원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학생들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도 분명 늘었다. 이렇게나 가정과 학교와 학원에서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었는데, 학생들은 과거에 비해 인지적 영역에서 그에 상응하는 향상이 있었는지 혜량할 필요가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투입이 많으면 산출도 많아야 한다. 조기교육 붐이 불면서 아동기부터 학원과 학교에서 공부타령 국영수 타령을 그렇게나 들었던 세대들은 언어 사용 감각도 좋아야 하고, 영어·수학의 학업성취도도 탁월해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학교에는 과제물이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오지 않는 학 생들이 점점 늘어난다. 체육 시간과 점심시간만 생생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멍한 채 있는 학생도 많아진다. 자신의 일이고 자신의 인생인데 심드렁하기 그지 없다. 

어쩌면 학력저하라고들 운위되는 것은 무시해도 좋을 문제일 수 있다. 학력이란 계량화되거나 통계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PISA의 결과를 보아도 한국 학생의 교육 경쟁력은 세계 2위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한국어 문해력과 구사능력이 난감한 학생들이 늘어난다. 말로 표현하건 문장으로 나타내건 자신의 의견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내는 능력을 제대로 갖춘 학생을 교실에서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것은 상당수 교사들이 경험하는 현실이다. 혹시나 20~30년 전의 중·고등 학교에서 교사들이 줄줄 교과서를 읽어 내리면 진도가 끝났던 교수법이 더욱 우월한 교수법이었을까? 입시위주의 교육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의 교육이 언제 입시에 종속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교수법은 문제와 관련이 없다. 교과 중심의 학교라서 그리고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 것이 아닐 수 있다. 전혀 무관해 보이던 것들이 사태의 핵심에 폭풍의 눈처럼 조용히 있다. ‘인성교육’이라는 게 뭔지, 그런 게 원래 있었는지, 실제로 학생들에게 인성이란 걸 교육을 통해 심어주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그리고 인성교육의 반대편에 입시교육(또는 교과교육)이라는 게 있어서 두 가지의 균형을 잘 맞춰야 제대로 된 교육인지,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오히려 현실에 대한 알리바이로 작용하여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늘리면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심지어는 교육이라는 게 그렇게나 중요한지 혜량에 혜량을 더해야 한다. 

자녀교육을 위해 사용하는 돈을 투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투자와는 약간 다른 것 같지만 교육비를 투자라 할 때, 교육에 돈을 들이면 그만큼 달라지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교육비용은 투자가 아니라 도박이나 투기에 가깝다. 과도한 조기교육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게 되거나 원형 탈모를 보이는 아동이 늘어나지만 그저 몇 사람이 혀를 차면서 안타까워 할 뿐 현실이 어떤 식으로 개선되거나 하진 않는다. 정말 교육을 투자라고 생각한다면 합리적인 투자를 할 것인지 도박성의 투기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투기를 통해서 재산을 잃거나 증식하는 것과 과도한 조기교육을 통해 자식을 망치는 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범주의 일이다. 그런 안타까운 일은 일부 알파맘에게나 있다고 믿으신다면 주변을 돌아보시기 바란다. 과연 알파맘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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