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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Sep 03. 2018

19. 양육가설

  놀이할 때 아이는 그의 나이보다 더 성숙하게 그리고 그의 일상을 초월하여 행동한다. 놀이할 때 아이는 마치 한 뼘 키가 더 커진 듯 하다.  In play a child always behaves beyond his average age, above his daily behavior. In play it is as though he were a head taller than himself. 

–– Lev Vygotsky. Russian psychologist 1896-1934 


  양육가설은 이 시대의 주류이고 대세이며 독점적인 육아론이다. 우리 모두는 양육가설이란 용어를 처음듣는다 해도 이미 양육가설의 신봉자이다. 인간의 정신은 백지상태로 태어나서 인간은 환경이 만드는 바대로 성장한다는 믿음을 행동주의라고 하는데, 조기교육의 성과를 확신하는 양육가설은 신행동주의라고 할 만하다. 한국의 부모들 중에서 육아에 관심 좀 있다고 한다면 양육가설 신봉자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키우는 데로 자란다는 믿음, 그래서 양육은 중요하며 매우 중요하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양육가설이다. 

  물론 양육가설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들이 있다. 양육과 대비되는 유전은 엄마의 뱃속에 수정란이 착상되는 순간 얘기할 거리가 없어진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주게 된다. 유전자를 바꾸는 것이 가까운 미래에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아직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유전과 양육의 두 가지 말고 다른 뭔가가 있다면 한국의 현실에서는 강남 또는 8학군으로 상징되는 교육환경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 거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이래저래 부모로써 기댈 곳은 자신의 양육이 아이의 미래를 만든다는 양육가설뿐이다.  

  그런데 양육가설은 매우 위험하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부모가 보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부모들은 또래집단 속에서 자녀들의 진면목을 잘 모른다. 알 수 없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부모로써 진짜 자신의 아이를 알고 싶다면 아이가 또래들과 보내는 시간을 관찰해야 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나 친구의 부모 앞에서 별 탈없는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가? 부모들은 자기 아이를 안다고 착각할 따름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교사들이 증언해 준다. 당신의 자녀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이 당신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부모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최선의 정성을 기울여 자녀들을 가르치고 키워왔는데 그 결과는 어떤 지 주위를 둘러보자. 그렇게 많은 정성과 애정과 비용으로 유년기부터 아동들을 키워왔으면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20대들은 엄친아여야 말이 된다. 물론 20대 전부가 서울대 법대생이나 의대생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20대끼리만 비교해선 안된다. 그 이전의 세대와 비교해야 한다. 조기교육으로 공을 들여 키운 1세대 한국인이 현재의 20대들인데 이들이 앞선 세대보다 뭔가 우월한 점이 관찰되어야지 양육가설은 가설이라는 이름표를 뗄 수 있다. 그러나 20대가 앞 세대에 비해 특별히 바보거나 부족한 점이 없는 것처럼 조기교육이란 것이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커왔던 세대에 비해 특별한 것이 전혀 없다. 

  성격형성이라는 면에서 양육가설은 친구들끼리의 관계나 사회성을 등한시 한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다양한 프로그램과 체험학습과 등등 쪼물락거리면서 훌륭한 성장을 도모하는 것인데 이 와중에 성인 대 아동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인간관계의 주된 경험으로 삼아 성장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성인도 물론 어린이에게 평가를 받지만 그러한 평가가 성인에게 불리하게 활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권력의 추는 대체로 성인에게 기울어져 있다. 성인과 아동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일방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성인과 아동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학교와 가정과 학원의 고리를 무한 순환하면서 성장하도록 강요 받은 경우 독립된 판단과 실행에 따른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내하기 힘들어 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인간은 그렇게 경험에 즉자적으로 지배만 받는 존재는 아니다. 

  분명 아이들의 성장에서 부모의 양육이 절대적이지 않다. 가정이 아이들의 모든 것을 다 떠맡을 수는 없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 비판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아동은 분명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다만 가정 밖의 인간관계 속에서 오히려 부모보다 많은 영향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양육가설 비판의 요지이다. 

  같은 집에서 성장한 형제나 자매는 유전자도 비슷하다. 한두 가정이 아니라 수십 수백의 가정에서 환경과 유전자가 성장 과정에 미치는 영향이 예상보다 훨씬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란성 쌍둥이 조차 같은 집과 같은 교실에서 성장하며 비슷한 경험을 하더라도 실제 개성이나 성격 등 여러 면이 달라진다. 각자는 주어진 경험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며 생활방식과 전략도 다르게 구사한다. 

  유아기에서 성인기까지 장기간 동안 100명 정도를 연구한 결과, 어머니의 ‘육아습관’이 가지는 의미는 통계적으로 6%정도였다는 결과가 있다. 입양된 형제·자매들은 장기간 같은 집과 동네에서 같은 부모와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더라도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이는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자매가 성격상 비슷한 것은 다름 아닌 생물학적 영향, 즉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양육가설은 성장 환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환경의 영향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주의를 기울여 엄밀하게 준비한 부모의 양육 방향이나 설계는 처음의 의도와 전혀 무관한 방향으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영향을 주려 한 의도적인 부분보다 자녀에 대하여 무의식적이고 임의적인 대응이 장기간에 걸쳐 깊은 영향을 드리울 수도 있다. 

  전통사회의 아동들은 보통 5세 정도에 놀이생태계에 입문한다. 현 30대 이상들에게도 익숙한 ‘깍두기’로써 놀이생태계에 진입하였다. 이들은 보통 나이 많은 아동들에게 적절한 보호와 지도를 받지만 절대 과보호를 받을 수는 없다. 고참 아동들은 자신들만의 활동과 영역이 있다. 신참들은 처음에 응석을 부릴 수도 있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점차 놀이 생태계 내의 불문율들에 익숙해야 한다. 깍두기들은 약간의 보호와 약간의 무시가 섞인 다른 아동들의 태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나도 잘 할 수 있다. 나도 잘 하고 싶다. 나도 올라가고 싶다. 나도 저들과 함께 하고 싶고 할 수 있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한다. 가족을 떠나 타인들 사이에서 인정투쟁이 시작된다. 성인이나 손위의 형제로부터 약간의 도움과 원조를 받을 수도 있지만, 본인의 판단과 노력과 행동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말 그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동성 친구들로 이루어진 놀이생태계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일 때, 아동은 그 안에서 매우 복잡한 관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불어 놀이생태계 외부에 존재하는 힘센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전략을 실행·연습할 기회도 얻게 된다. 기성세대의 문화를 전수받으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이중성은 놀이생태계의 기본적 성격이다. 물론 도시의 경우가 다르고 어린이라고 해야 촌락에서 손꼽을 정도의 놀이생태계의 경우 순응성이 밖으로는 두드러져 보이긴 한다. 

놀이생태계는 아름답고 선한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놀이생태계의 이중성에서 관계의 역동성이 나온다. 지위와 권력을 또래집단 내에서 획득하고자 각 개체는 전략을 짜고 실행하고 그 결과에 맞추어 수정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개개인의 성격상 개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탄생하고 성인기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사회적 전략을 세련화하는 능력을 연습한다. 

학업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양육환경은 아동이 목표에 근접했을 때 보상을 제공하고, 목표에 멀어졌을 때 처벌을 한다. 늘상 잠재적인 위협에 노출된 아동들은 개인적으로 파편화된 대응 속에서 장기적인 전략을 짜기 어렵다. 자신의 주장은 늘 뒤로 밀리게 된다. 물론 현대와 같이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시대에 자신의 판단과 실행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이른바 과보호의 문제를 심도있게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동물행동학과 심리학이 제공하는 여러 성과를 참조해야 한다. 88만원 세대는 어린 나이부터 공교육과 사교육의 순환 구조 속에서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문화를 향유할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다. 어려서부터 학업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양육환경은 과보호와 맞물리면서 순응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을 강화시키게 된다. 70년대 생의 경우 국민학교 시절부터 사교육 푸쉬를 당한 경우는 과반이 넘지 않는다. 이들을 포함하여 지금 학부모 세대가 겪은 놀이 생태계는 경쟁과 승리를 추구하는 성향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 여하튼 88만원 세대들은 아동 시절부터 계속 부모·교사·학원강사인 어른들의 보호 속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보내야 했던 첫 세대였다. 그들이 보이는 현실에 대한 순응성은 이 점과 깊은 관련이 있을 듯 하다. 이 세대의 구성원 대다수는 성인의 일방적인 지시와 관리가 일상적인 경험으로 주어진 환경에서 늘 시험성적에 따른 처벌과 보상을 거듭 받았다. 부당한 사회적 대접을 받아도 분노를 집단적으로 묶어내지 못하는 것은 단지 ‘죄수의 딜레마’나 사회경제적 원인 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순응성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양육가설 비판을 우리가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습관에서 양육이나 육아에 해당하는 ‘키운다’는 표현이 ‘아이가 자란다’는 표현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각을 반영하는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커가는 자율적인 성장과정을 통찰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키우는 데로 아이들이 클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루어지는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행태가 20세기말에서 21세기 초에 이르도록 계속되는 점을 분명 잘 돌이켜 봐야 한다. 양육가설 비판은 워낙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있어서 부모된 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가설이기에 부모의 역할이 해리스가 주장하는 데로 성장에 있어 약 6%정도가 아니라 좀 더 클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한 인간을 키운다는 사고와 한 인간이 자란다는 사고를 융해시키고 실제에 있어서도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측면을 교직시킬 수 있다. 

놀이생태계는 자치의 역동학과 리더십을 연습하는 장이다. 아이들이 집단 내에서 늘 1/n씩 역할을 분담하진 않는다. 방향을 설정하고 집단을 움직이려는 리더와 그 추종자들, 그에 반대하는 반대편 리더와 추종자들,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제3지대의 부동층이 존재한다. 리더들은 부동층을 설득하거나 반대편과 타협하면서 계속 성장한다. 이런 놀이 생태계가 교란된 곳에서는 아이들은 군중이 되기 쉽다. 다시 말해서 폭주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한계를 설정하고 방향을 전환할 리더십이 필요한데, 연습을 충분히 할 곳이 없다. 위험한 에너지는 학교 내에서는 왕따 정도로 표출되지만, 성인이 되면 한층 위험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경우 대다수 아동들에게 무력감을 강요한다. 어린이들이 어떤 과업에서 좌절과 실패와 열등감과 무능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그 일을 싫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기존중감이나 자신감까지 결핍되게 된다. 그렇다면 점점 길어지는 과보호 기간과 더불어 의존적이고 주관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아동들은 분명 자신에게 유능감을 선사하는 행동을 강화하는 본능적 경향을 따르게 된다. 어른이라고 다르랴. 자신이 남들보다 명확하게 못하는 활동을 강요받는 일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며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성인들은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상황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자신의 생존을 모두 부모와 성인에게 의존하는 아이들의 경우는 어떨까.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생존을 담보로 이러한 활동을 강요받게 되면 자아는 무능감과 열등감에 빠지게 된다. 그 경험이 장기화되면 나중에는 혼자서건 남의 도움을 받건 빠져 나오기 힘들게 될 수도 있다. 

현재 한국 어린이의 놀이생태계가 학교와 학원을 구심점으로 삼기에 생겨나는 위험이 있다. 어린이들은 분명 경쟁에서 지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유능감을 느낄 수 없는 활동은 몇 차례 시도 후에는 본능적으로 기피하고자 한다. 기피하고자 해도 유능감을 달성할 다른 공간이나 기준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지금 학교에서 보는 수많은 학생들은 획일적인 기준에 따른 경쟁과 그 성패에 따른 처벌과 보상, 일방적인 관계성 등의 수많은 현대적 위험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점점 더 많은 증거를 통해 우리는 청소년기 이후에도 뇌가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동기의 뇌발달이 가장 결정적이라는 가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대신 십대들이 자신에게 남은 긴 생애 동안 대부분의 경우에 유익할 수 있는 특성과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칙센트미하이가 수 천 명을 대상으로 다년간 조사한 결과 십대들의 가장 의미있는 활동은 ‘일 같기도 하고 놀이 같기도 한 활동’이었다. 미국 사회처럼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성공했다라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이들의 공통점이 하이틴 시기의 지위체계와 관련이 깊다. 이는 우리가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웅변해준다. 

우리가 부모로써 자녀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치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는 혹시 허상이며 과대평가이고 과도한 정당화일뿐더러 그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만이라고 고려하여 보자. 우선 우리 인간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동물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깨 위에서 정말 많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예전에 읽었던 책이나 만화를 떠올려 보자. 유·소년기에 읽게 되는 수많은 동화에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말하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런 책을 읽고 동물이 사람의 말을 하는 허위의 세계를 믿게 될까 걱정하는 어른들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의인화된 서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그런 책을 읽으면서 성장한 뒤에 동물들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고 인간에게 여러 가지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우리 인간은 주변의 타인들의 언행을 부단히 관찰하고 자신의 행동을 그에 동조하도록 진화되었다. 양육가설은 그 점을 강조한다. 부모의 양육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두 관찰 대상이 되며 특히나 동성의 또래집단은 부모의 영향력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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