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원식 Aug 02. 2018

3. 놀이의 비밀


정말로 마지막으로 말하면, 인간은 그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인 한에서만 놀며 또 노는 한에서만 완전한 인간이다. 

-쉴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한 서간집 


보리차와 앵두나무 

어렸을 적 골목길에서 놀면서 보낸 그 많은 날들과 그 숱한 시간을 잠시 떠올려 본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참을 놀다가 목이 마르면 집이 가까운 친구가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그을음으로 얼룩진 알루미늄 주전자를 들고 온다. 컵 같은 건 없었다. 모두 주전자 주둥이로 마시거나 주전자 뚜껑에 물을 따라 마셨다. 서로 빨리 마시려고 난리를 쳤고 한 모금이라도 더 많이 마시려고 했다. 아주 흔한 보리차였다. 그 후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만큼 맛있는 물을 다시는 마실 수 없었다.  

집 마당에는 앵두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와 동생은 틈만 나면 그 나무 위로 올라가서 놀곤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몸이 무거워지니 그 이전 해 올랐던 높이까지 올라가기 어려웠다. 내 몸무게를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가 사정없이 휘어지곤 했다. 6학년인가 중학생 쯤 되니 내 키보다 약간 높이 올라갈 수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앵두나무의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더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었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기도 했다. 저녁 준비를 마친 친구 엄마들이 친구들을 데려가고 혼자 어둑한 골목길에 남아 돌부리나 차며 느꼈던 그 쓸쓸함이 생생하다. '마징가Z'같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TV가 있던 친구 집으로 몰려가던 그 흥겨움 역시 생생하다.  


놀이의 멸종과 술래잡기류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함께 보낸 시절을 회상하다가 그 허다한 놀이들이 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골목길과 앵두나무가 있던 집은 이제 아파트 단지가 되었거나 차들이 점령해버렸다. 아이들은 이제 골목과 놀이터를 떠나 학원과 PC방에 깃들인다. 그런데 그 놀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저 20세기 소년소녀들의 기억에 추억담에 남아버리고 영영 사라진 걸까?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아직도 아이들의 생활에 살아남은 놀이들이 몇 가지는 있다. <얼음땡>,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탈출>, <지옥탈출>, <경찰과 도둑> 등등의 놀이는 아직도 완전히 멸종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현대의 도시 환경에도 맞으니까 아직도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공통점을 한 가지 더 찾아보자면 쫓고 쫓기는 ‘도망과 추적의 구조’와 접촉에 의한 ‘사망과 소생이라는 테마’가 있다. 기성세대들은 다방구 라고 기억하는 술래잡기의 기본적인 구조와 테마를 가진 놀이들이 21세기라는 엄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셈이다. 술래잡기는 이렇게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력은 술래잡기라는 놀이가 태어난 당시부터 가진 원시적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피구나 긴줄넘기 손수건 돌리기 같이 구조와 테마가 같으면서 간단한 도구를 더한 놀이를 ‘술래잡기류 tag game’라고 이름 붙여 보자.  

술래잡기류는 놀이의 원형질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력과 원시성을 가지고 있다. 옛놀이 중에서 아이들이 아직도 선호하는 놀이를 꼽아보면 술래잡기류가 절대 다수인 까닭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사람 뿐만이 아니다. 사람 이외의 동물 중 상당수가 술래잡기의 기본구조와 테마를 가진 놀이를 즐긴다. 까마귀나 까치 같은 일부 조류와 상당수의 포유류가 술래잡기를 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사냥을 통해 먹고 살거나 사냥감이 되는 동물들은 거의 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한다. 아마 먼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를 통해 추론해 보면 수 천만 년에서 수 백만 년 정도 전부터 고등생물들이 술래잡기 놀이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술래잡기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허망할 정도로 단순하거나 불가능하다.  

21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도망과 추적, 죽음과 소생이라는 구조와 테마는 술래잡기라는 놀이를 넘어서 무수히 많은 예술과 인간 활동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에서 이런 구조나 테마가 없는 종목을 단 하나라도 떠올려 보시라. 이 테마는 낭만적인 사랑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허다한 예술 작품에서 반복된다. 이야기라는 틀을 가진 모든 장르가 이 테마 없이도 성립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먼 미래에도 인류는 새로운 놀이를 끝도 없이 만들겠지만 술래잡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인류 이외의 동물종은 계속 술래잡기를 할 것이다. 

놀이 중에서 인류보다 오래되었고 인류보다 오래 남을 놀이가 술래잡기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면 놀이라는 현상과 활동의 원형을 간직한 이 술래잡기류를 무수히 많은 놀이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놀이의 원형이자 심층구조로써 술래잡기류를 놀이의 특별한 범주로 대접하는 것은 어떨까? 수많은 학자들이 놀이를 분류하려고 여러 기준과 규범을 만들어 보았지만, 그 중에 술래잡기류의 놀이에 특별한 지위를 줄 수 있는 기준은 없다. 하지만 인종과 문화를 넘어서 심지어 생물종을 넘어설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 이 놀이에 어떤 비밀이 감춰진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놀이라는 현상은 통념이 말해주거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숨겨놓고 있다. 여러 놀이 중에 인류 보편을 넘어서 상당수의 포유류와 일부 조류가 즐기는 술래잡기 놀이에 일견해서 알기 힘든 뭔가가 있을 가능성을 탐색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력과 최소형식 

현 20대들에게 어렸을 때 했던 놀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놀이를 꼽으라고 하면 압도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바로 ‘탈출’이다. 탈출은 놀이터의 놀이기구 위에서 하는 술래잡기이다. 21세기 포스트모던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소년소녀들이 즐기는 이 놀이는 흥미롭게도 원시와 현대의 접점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도 석기문명을 유지하고 수렵채집 경제을 운영하며 부족단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어릴 때부터 피그미 술래잡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놀이를 한다. 그런데 이 놀이는 ‘탈출’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도시의 놀이터에서 놀이기구 위를 날아가듯 달리는 아이들과 아프리카의 울창한 밀림의 수목 위를 달리는 아이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을 수 없다. 인류가 사바나 평원을 달리기 전에 밀림 속에서 살아가던 그 원초적 시공이 탈출놀이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어린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일단 시작하면 부상을 감수할 정도로 몰입하게 되는 것도 바로 원시적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술래잡기는 그만큼 몰입도가 높은데 비해 숙련도가 낮다. 문헌에 따르면 피그미족은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나무를 타면서 술래잡기를 한다고 되어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술래잡기를 하려면 그저 뜀박질이나 좀 하면 된다. 규칙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술래잡기는 최소형식의 놀이이다. 비인간 동물이 하는 놀이 중에서 복잡한 형식을 가진 편이지만 인간 동물이 문화적으로 전승하는 놀이 중에서 가장 단순한 형식의 놀이가 바로 술래잡기이다. 문명이 얼마만큼 성숙한 단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놀이들은 그에 비하면 규칙도 복잡하고 높은 숙련도를 요구한다. 팽이치기나 비석치기나 망차기 등의 놀이를 생각해 보자. 이런 놀이에서 재미를 느끼려면 어느 정도 숙련된 손기술이나 발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놀이든 숙련도가 높아지려면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놀이를 대하는 태도와 원리 

프랑스의 사회학자 로제 카이와는 이런 숙련도를 루두스라고 하였다. 루두스는 놀이에서 어려움을 추구하는 경향으로써 노력과 인내와 재주와 재능의 연마를 요구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떠올려 보면 루두스가 어떤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현대인이 즐기는 놀이의 대다수가 루두스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있다. 전자매체의 놀이 중에서 처음부터 잘할 수 있는 놀이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놀이에서 레벨치를 올리려면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카이와는 놀이를 대하는 태도로써 루두스의 반대 극단에 파이디아를 상정하였다. 파이디아는 발산과 즉흥과 소란이며 희열의 원초적인 힘이다. 동양의 개념으로는 흥이나 신명과 매우 유사하다. 강강술래같은 원무를 춰보았다면 그런 놀이에서 우러나오는 에너지가 얼마나 강한지 알 것이다. 근대의 놀이로 올수록 파이디아에서 멀어지고 루두스가 강하게 된다. 파이디아라는 측면에서 보면 술래잡기는 근대의 여러 놀이가 지니기 힘든 특성을 가진다. 

술래잡기류의 생명력를 해명하는데 원초성이나 파이디아 만으로 충분치 않다. 카이와의 이론틀을 빌려 논의를 계속해보자. 카이와는 4가지 원리로 놀이를 분류했다 : 아곤과 알레아와 미미크리와 일링크스. 아곤은 ‘경쟁’이라는 뜻으로 참여자의 힘과 기량으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이다. 알레아는 ‘운’이라는 뜻이며 주사위 같이 우연과 운에 좌우되는 놀이이다. 미미크리는 ‘흉내’라는 의미로 가면이나 소꼽장난 처럼 모방하는 놀이이다. 일링크스는 ‘현기증’을 의미하며 미끄럼, 그네, 춤 등의 놀이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원리는 하나의 놀이에 하나의 원리가 단독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한 놀이에 여럿이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현대의 성인들이 즐기는 대표적인 놀이로 도박과 관람을 들 수 있는데, 도박은 알레아와 일링크스가 극적으로 결합하며 스포츠 관람은 승부와 동일시 즉, 아곤과 미미크리가 결합하는 것이다. 

술래잡기는 놀이의 네 가지 원리를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술래 대 도망자는 뜀박질의 속도를 가지고 경쟁한다. 도망과 추적의 구조는 달리기 경쟁을 통해 주로 나타난다. 달리기의 아곤이 작용하기 전에 먼저 알레아의 원리가 작용한다. 예전에는 술래를 뽑을 때 노래를 부르곤 했지만 요즘은 거의 가위바위보를 통해 술래를 정한다. 예나 지금이나 술래가 될 것인지 도망자가 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운이다. 술래로 선발되는 것은 운명이지만 술래가 되는 순간 미미크리가 작용한다. 술래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술래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도깨비며 괴물이며 범이며 독수리며 포식자이다. 술래잡기 놀이를 오래하면 참여자는 일링크스를 경험하게 된다. 요즘에는 아동들의 체력이나 건강 문제가 있긴 하지만 술래잡기는 보통 짧은 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몇 시간이고 지속되면서 술래와 도망자는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는 쥬이상스(고통을 동반하는 경련과 가슴졸임)을 경험한다. 술래잡기는 재미를 넘는 쥬이상스를 제공한다. 이것이 술래잡기의 일링크스이다. 몇 시간을 달리고 난 다음에 지치고 기진맥진하여 괴로움까지 느끼게 되지만 다음 날도 또 하게 되고, 몇 살 안되는 유아부터 청소년이나 성인기까지 계속 술래잡기를 하게 만드는 재미를 넘어서는 그 재미가 바로 일링크스다. 경쟁과 운수와 모방과 황홀의 놀이 원리가 술래잡기의 각 단계에서 작용하는 것과 유사한 사례는 다른 놀이에서 찾을 수 없다. 

일이년 사이에 유행하는 놀이가 있고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의 시대를 따라 부침하는 놀이가 있지만 술래잡기는 그런 유행과 시대의 흐름를 허망하게 만드는 힘과 비밀이 있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제 술래잡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런닝맨’을 보기도 하지만 술래잡기를 직접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고 해서 술래잡기가 예전부터 어린이의 놀이는 아니었다. 우선 알아둘 것은 중세까지 어린이와 어른의 놀이는 구분되지 않았다. 중세만 하여도 어른들끼리 술래잡기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궁정에서 업무를 팽개치고 술래잡기를 한다고 금지령이 내려졌다는 유럽의 기록도 있다. 


몸의 감각과 원시적 쾌락 그리고 슈퍼에고 

성인의 놀이와 아동의 놀이를 구분하게 된 건 근대부터이다. 근대 이전에는 어른의 놀이와 어린이의 놀이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지만 산업화 이후 어른들의 생활세계와 어린이들의 생활세계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던이 운위되던 90년대 이후 아이들 놀이와 어른들 놀이가 전자매체와 웹공간에서 통합되어 다시금 하나의 놀이생태계를 이룬다. 이 시대에 어른들이 술래잡기를 하지 않는 것은 체면과 신체 조건 때문이다. 성인들은 힘들어서 술래잡기를 하지 못한다. 조기축구에서 발동하는 체력과 술래잡기에서 발휘되는 몸의 감각은 사뭇 다르다. 스포츠는 전근대적 놀이를 체계화 분절화한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라는 축구도 중세에는 하루 종일 또는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달려들어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종횡으로 누비던 놀이였다. 이런 놀이들이 스포츠로 정리된 것이 18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발전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자본제의 시간제약과 규율에 적응해버린 성인들의 신체는 원시적 리듬을 담기에 버겁다. 성인에 비해 몸집이 작지만 심장의 크기는 비슷한 어린이들은 1`2회나 전후반으로 나눠지고 잘려지는 시간의 분절이 없는 놀이를 하기에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해도 달리기를 잘 못하거나 바깥놀이를 해볼 기회가 거의 없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어서야 술래잡기를 통해 달리기라는 행위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해본 아이들이 가끔 있다. 이 친구들은 ‘이렇게 즐겁게 달려본 적은 처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해석되어야 할 뭔가가 있다. 전에는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실내나 놀이터에서 그저 허용되는 만큼만 놀아 봤고 학교의 체육시간이라면 그저 줄넘기나 했던 아이들이 두 시간 정도 줄기차게 달리면서 ‘몸의 감각의 발견’이라는 사건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몸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운동기관을 통해 몸이 특별한 감각을 발산하면서 동시에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감하는 사건이다. 나 혼자 달려서는 절대 이런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에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 닌텐도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나 장난감 등의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다는 발견도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런 재미와 쾌락이 내 몸과 친구의 몸에서 함께 발산되고 발산된 이 에너지는 표정과 비명과 소리라는 기호로 다른 참여자에게 수용된다. 타인의 쾌락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은 의식할 틈도 없이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남의 쾌락과 나의 쾌락이 서로 의존한다는 ‘호혜성의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경험한다. 원래 호혜성이 없다면 놀이가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모든 놀이는 페어플레이를 불문율로 내장한다. 페어플레이는 너와 내가 평등하고 평등해야만 한다는 공정성을 의미한다.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바탕인 페어플레이 정신과 호혜성이 맞물려 ‘나-너’의 대등성에 대한 인식을 체화한다. 그러면서 내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며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해서는 쾌락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에서 아동의 슈퍼에고가 강화된다. 친구들과의 놀이 속에서 강화되는 슈퍼에고를 문화적 슈퍼에고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연령집단과의 관계보다 또래집단이라는 문화적 환경의 명령의 훨씬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술래잡기를 통해 보는 놀이의 비밀 

한국인들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진입하면서 골목의 놀이생태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불과 80년대만 하더라도 도시건 농산어촌이건 가릴 것 없이 20세기 소년소녀들은 자신이 사는 집 근처에서 온갖 놀이와 놀이할 자유를 누리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적게 잡아 50종 많게 잡아 100종 가까운 놀이가 계절을 갈마들면서 골목과 뒷산과 운동장에 서식했던 과거가 그리 멀지 않다. 그 중에 총싸움, 자전거, 축구 등 불과 몇 가지 놀이만이 21세기에 살아남았다. 공기놀이와 딱지치기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놀이는 술래잡기류의 놀이가 대다수이다. 피구와 손수건돌리기 대형의 놀이까지 포함하면 현재까지 아이들끼리 전해지는 놀이의 대다수는 술래잡기류에 들어간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몰입도가 지나치게 강한 게임을 언제 어디서나 향유할 수 있는 21세기 소년소녀들이 아직도 몸을 놀려 동무들과 뛰어 논다면 그 놀이는 십중팔구 술래잡기류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많은 놀이들이 문헌 속으로 사라질 때 술래잡기류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가장 편한 답을 대자면 ‘파이디아’라 하는 즉흥적 신명과 원시적 생명력의 발산과 원초적 단순성이라고 하겠다. 더불어 술래잡기류는 놀이가 시작되었다가 끝이 나는 전 과정에 놀이의 4가지 원리가 모두 작용한다. 이러한 특성에 더해 ‘목숨을 건 도망과 추적’이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들의 먹이사슬에서 광대하게 반복되는 이 보편성은 인류라는 종을 넘어선다. 쫓고 쫓기는 내용을 담은 놀이는 인간과 수많은 동물들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놀이 자체의 특성만 고려해서 놀이의 비밀에 가까이 접근했다는 속단을 내려선 곤란하다. 이러한 놀이를 함께 즐기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사회적 문맥 역시 중요하다. 아동들은 가까이 생활하는 친구들과 이런 놀이를 향유하면서 쾌락을 통해 자신의 몸의 감각과 사회적 관계의 핵심이자 정언명령인 슈퍼에고를 터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얼음땡이라는 간단한 아이들의 놀이에도 담겨진 비밀은 간단치가 않다. 

작가의 이전글 2. 애착: 최초의 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