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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Aug 02. 2018

5. 쾌락의 구조와 쾌락원리

분명히 모든 신의 백성들은 놀이를 좋아한다.  Surely all God’s people ··· like to play. 

–– John Muir. American naturalist 1838-1914 


놀이는 쉽지 않다. 어린이가 놀이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A child loves his play, not because it’s easy, but because it’s hard. 

–– Benjamin Spock. American pediatrician 1903-1998 


놀이는 사람을 내재적으로 동기화시킨다. 즉, 놀이는 즐겁고 하고 싶어 하는 활동이다. 한껏 놀이에 빠져 있을 때는 누구나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보다 더 즐거운 시간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놀이가 즐겁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어떻게 해서 놀이가 그렇게나 큰 쾌락을 주는지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놀이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출발해보자.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자발적이 된다는 것은 강요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놀이를 취사선택해서 하는 아이들은 강요된 놀이를 꺼린다. 강요된 놀이는 놀이가 아니다. 강요된 놀이는 즐거움을 줄 수 없다. 놀이가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몰입> 연작을 쓴 심리학자인 칙센트미하이가 말하는 ‘몰입flow’은 원래 놀이 이론에서 나온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한다. 

재미, 몰입, 쾌락을 신성한 경험으로 본다면 놀이는 쾌락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된다. 놀이는 몸에서 쾌락을 끌어내기 위해 세계와 자아를 연결하는 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놀이에서 쾌락은 자기 자신과 세계, 타자, 상대방 놀이자 혹은 놀이 규칙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쾌락이라는 신성한 경험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아는 데서 시작한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신의 몸이 감싸고 있는 자아이며, 이 자아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관계망이다. 우리의 몸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철학자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고 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코나투스는 자신이 속한 사회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놀이의 참여자로써 나와 남을 안다는 것의 바탕에는 신뢰가 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면 놀이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믿음이 안 가는 아이들은 놀이에서 배제된다. 신뢰가 없다면 놀이는 불가능하다. 놀이에서 신뢰는 참여자 모두가 페어플레이를 하여 놀이의 진행이 공정하리라 믿는 것이다. 놀이 진행이나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면 놀이에서 쾌락이 발생하지 않는다. 페어플레이가 없다면 일방적인 우월감이나 분노만이 생겨나게 된다. 공정한 놀이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예측불가능성은 놀이의 생명이다. 승부의 결과가 뻔한 놀이를 하는 사람은 없다. 예측불가능성에서 스릴과 긴장과 진지함이 나온다. 이 스릴과 긴장과 진지함은 바로 몰입을 낳는다. 놀이에서 쾌락은 이와 같은 과정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놀이에서 쾌락은 공정함이라는 윤리가 그 바탕이 된다. 

놀이에서 공정함을 보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놀이 규칙이다. 놀이 규칙은 놀이자의 자유를 제한한다. 놀이 공간 안에서 놀이 규칙의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무제한의 자유를 가진 놀이자는 놀이판을 파괴하게 된다. 놀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놀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놀이 규칙을 받아들여서 지켜야만 한다. 놀이에서 쾌락이라는 신성한 경험을 얻고자 한다면 놀이 규칙이라는 억압을 받아들여야 한다. 놀이 규칙은 그리하여 쾌락과 억압의 이중구조를 만들어낸다. 억압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작용하고 쾌락은 플러스 방향으로 작용한다. 마이너스를 인정해야 플러스가 생겨난다. 놀이는 이러한 음양의 상반성을 가진다. 

누구나 즐거움을 원한다. 즐거움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이 만족스럽거나 그냥 지낼 만은 하다는 의미의 층위를 넘어선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물들은 놀이를 하면서 즐거움을 보상으로 받는다. 동물들은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될 법한 행동을 연습한다. 이를 ‘적응적 유용성이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은 모두 추적놀이를 즐긴다. 단순하게 쫓고 쫓기는 달리기를 하면서 새끼 동물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초식동물의 새끼들은 달리면서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기를 즐긴다. 그러나 육식동물의 새끼들은 추적놀이 다음에 ‘레슬링’하듯이 몸싸움을 하고 물어뜯는 시늉을 하면서 논다. 이러한 놀이를 하면서 동물의 어린 것들이 즐거워한다는 것과 이 놀이들이 동물의 생존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물들은 이와 같이 여러 놀이를 하면서 적응적 유용성이 있는 행동을 강화한다. 간단히 말해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지상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동들은 대체로 즐거움을 준다. 

이 경우에 쾌락이 앞선 것인지 생존이 앞선 것인지 가리기 힘들다. 놀이는 분명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의 생존에 이바지하는 메커니즘을 가지는데 여기에 쾌락이라는 감각의 경험이 더해진다. 한 마디로 ‘유익한 것은 즐겁다’이다. 중요한 일이니까 괴로워도 해야 한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원리이다. 괴로워도 억지로 해야 한다는 산업시대의 명제는 분명 새로운 것이지만 이를 수백만 년이나 된 쾌락원리에 비교하면 전혀 새롭지 않다. 

놀이는 쾌락의 억제를 통한 쾌락의 확대를 연습하는 행위다. 뒤집어 얘기하면 놀이는 쾌락의 확대를 위한 쾌락의 자율적인 억제 연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류의 자기계발서 내용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얘기다. 자기계발의 억제는 인내이고 더 큰 보상에 대한 기대를 동기로 가진다. 놀이에서 쾌락의 억제는 합의된 놀이 규칙과 그 규칙을 함께 지켜야 하는 동료집단을 매개로 한다. ‘놀이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집단 윤리가 있고,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개인의 자유가 있다. 놀이는 둘 사이에 있을 법한 최적의 균형점을 찾아보는 연습이 된다.  

규칙을 어기는 아이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놀이의 룰을 위반하면서 자신만의 쾌락을 얻으려 한다면 놀이판이 깨지게 된다. 금을 밟았거나 공에 맞았거나 술래에게 잡혀서 죽어야 할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놀이판을 휘젓고 다닌다면 영화에나 나오는 좀비가 실제로 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놀이 파괴자는 여러 가지 경로로 제재와 단속을 당하게 마련이다. 말과 시선과 거친 행동으로 제재를 받으면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 지 자각하게 된다. 그래도 계속 좀비로 행동한다면 관계가 끊어지고 따돌림을 받게 된다. 각각의 참여자들은 놀이를 통해 쾌락을 지속적으로 얻기 위해서는 주체의 일시적 쾌락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내면화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슈퍼에고의 출현이다. 문화적 슈퍼에고는 또래집단의 놀이생태계에서 가장 엄혹한 방식으로 학습된다. 친구와 관계가 끊긴다는 것은 성인 이전의 아동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처벌이다. 

인류의 생존에 사회성이 필수적이었다면 사회성에 대한 보상은 매우 강렬해야 하되 반대급부로 질서와 규칙이라는 메커니즘을 가지게 된다. 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가져오도록 되어있다. 질서와 규칙을 어기는 행동은 사회에 대한 위험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위반자는 따돌림이나 구금 등의 일정한 제재를 받게 된다. 그러나 놀이에서는 억압 기제가 쾌락을 수반 할 수 있다. 억압 기제가 난관으로 작용하여 손쉬운 성취를 방해하기 때문에 좀더 얻기 힘든 쾌락이 발생한다. 인간은 놀이를 할 때 즐거워지게 되는 놀이 메커니즘’을 진화시켰다. 

놀이는 공동체의 질서와 규칙을 준수하고 놀이 기술에 숙달되기 위한 연습하는 억압 기제를 필요로 하면서 그 억압을 발판 삼아 도약하는 쾌락을 제공한다. 놀이에서 규칙은 억압이므로 마이너스 지향을 가진다. 허나 동시에 쾌락을 가져오는 플러스 지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놀이의 규칙이 억압과 쾌락을 동시에 가져오는 상반성을 지닌다. 이를 ‘놀이의 쾌락 역설’이라 하자. 놀이는 함께 하는 타인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놀이를 함께 하는 친구나 상대자와 협동하고 경쟁하고 승부를 겨루는 과정에서 의외의 많은 과정들이 진행된다. 

또한 동료와 협동을 할 때 인간의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쾌락물질이 나온다. 놀이할 때 아이들은 자기가 죽어서 팀에 도움이 되었을 때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자기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행동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때,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거나 정반대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는 기쁨과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얘기다. 놀이는 그 특성상 외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개인 입장으로 참여하는 놀이는 사회적 인정과 성취감이라는 보상이 따르고, 협동 놀이는 소속감과 성취감의 내적 보상이 따른다. 사회적 보상과 내적 보상이 갈등을 이루는 상황은 놀이 안에서 흔하다. 그 상황에서 개인은 어떤 쾌락을 선택할 지 기로에 선다. 개체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것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만이 아니며, 단순한 순응과도 구분된다. 발달이론에서는 협동을 “사회적인 책임에 관한 통합적인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이러한 점을 차치하고 보아도 놀이는 쾌락을 발견하고 생산하는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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