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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식 Aug 10. 2018

6. 신성한 질서와 신성한 내용

인생은 놀이로써 살아져야 한다.  Life must be lived as play. 

–– Plato. Greek philosopher. 427-347 BCE 


놀이의 신성성은 놀이 질서와 놀이 내용에 또한 담겨있다. 놀이 질서는 ‘대결하는 쌍방이 각각 한 번씩 번갈아 한다’거나 ‘합의하에 규칙을 정할 수 있다’거나 장기나 체스같은 놀이에서처럼 이미 ‘놓여진 말을 옮긴다’거나 바둑을 둘 때는 ‘말을 하나씩 둔다’등의 놀이의 외적 특성을 말한다. 놀이 질서는 대체로 변형이 쉽지 않다. 이에 반해 놀이 내용은 놀이의 내적 특성을 이르는 말로써 변형이 비교적 쉽다. 장기와 체스는 놀이질서라는 측면에서 같은 계열의 놀이지만 놀이 내용은 다르다. 놀이의 질서와 내용은 놀이규칙으로써 때론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놀이는 일상 속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놀이의 질서는 일상의 질서를 벗어난다. 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일상의 질서는 정지한다. 물론 놀이판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일상이다. 놀이판 한 발짝 너머의 일상의 리듬 속에 머물며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한 발짝 너머의 놀이 공간은 금지된 공간이다. 놀이가 시작된 이후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놀이하고 있는 이들에게 소환되어야만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다. 몸이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있지만 이는 놀이를 방해할 따름이다. 먼저 놀이공간을 이룬 놀이자들에게 소환되어야 놀이의 질서에 합류되어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다. 

이 놀이 공간은 놀이 참여자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합의한, 그래서 신성한 질서가 지배한다. 놀이의 신성한 질서는 놀이규칙을 포함하되 놀이규칙을 넘어선다. 그 질서는 놀이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유효한 시한성을 가지며, 놀이공간 안에서만 유효한 제한성을 가진다. 놀이 질서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 속에 작동하지만 동시에 완결된 구조를 가지는 완벽성을 특징으로 한다. 놀이의 신성한 질서는 현실의 질서와는 달리 불편부당하여 모든 놀이자에게 공정하다. 공정함은 놀이에 있어서 신성의 다른 이름이다. 공정하지 않은 놀이에는 신성이 없다. 공정한 놀이는 그 승패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 승리의 여신이 누구에게 미소를 보낼 지 놀이가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놀이의 신성한 질서는 기계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 이전의 합리이다. 페어플레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주 어린 아이나 신체적 약점이 있는 아이는 (깍두기라 하여) 다른 놀이자들이 갖지 못하는 힘과 기회와 생명을 얻기도 한다. 

놀이의 내용 역시 신성하다. 놀이내용은 현실의 내용과 조응한다. 그러나 현실의 내용은 늘 구체적이지만, 놀이내용이 현실을 참조한 경우에도 놀이내용은 분명 추상적이다. 놀이내용의 추상성은 현실의 내용과 관련이 있건 없건 신성하다. 현실의 전쟁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라는 구도가 명분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만 전쟁놀이에서는 정의로운 선이 불의의 편인 악을 물리치게 된다. 장기의 경우에도 초나라와 한나라의 대립은 역사적 실존인물인 항우와 유방의 대결을 참조하였으되 엄밀히 따지자면 무관하다. 또한 그네타기라는 보편적인 놀이가 고대 힌두교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의 일부였다는 점도 놀이내용의 추상성을 예시해 준다. 처녀가 그네를 타는 것과 한 해 농사가 잘되는 것 사이에 어떤 구체적 연관을 만들 수는 없다. 이처럼 원시 제의의 특성인 추상성은 바로 놀이내용의 추상성의 예시가 된다. 

놀이의 신성한 내용은 현실의 내용을 극단적으로 추상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방치기라고도 하고 땅따먹기라고도 하는 망줍기 놀이hop scotch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 이 놀이를 하기 위해 땅에 그리는 놀이판은 지역마다 다르며 현재 학자들이 확인한 것만 200 종이 넘는다고 한다. 이만큼이나 다양한 놀이판은 우연히 생겨나거나 심미적인 고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고유한 놀이판을 만들어낸 고대인의 천지관이나 저승관 담겨 있다. 어떤 문명권은 직선적 형태를 가지고 어떤 종교의 문명권에는 나선형의 형태가 우세하다. 여러 문명의 종교 유적지에 놀이판이 남아있는 점으로 보아 이 놀이는 한때 제의에서 연행되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여행을 상징했다. 반대로 원시시대부터 아이들의 놀이와 어른들의 제의는 끊임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면서 서로를 참조하였다. 그러니 아이들이 재미삼아 하던 놀이가 종교적인 의미들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먼저 아이들은 망줍기 놀이를 원시적 형태로 시작했다가 원시사회의 성인식intiative에서 입문자가 이승에서 길을 잃고 저승까지 다녀오는 과정을 상징하면서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놀이판이 생겨났을 수 있다. 부족사회보다더 큰 규모의 문명이 세워지면서 이러한 상징은 종교에서 활용된다. 

이렇듯 오래된 놀이는 추상적이면서 주술적이다. 연날리기만 해도 현실의 액운을 연에 담아 날려 보내는 주술적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 자신이 곧장 자연물이 되기도 한다. 놀이의 원시적 형태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동시에 21세기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얼음땡’이나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같은 놀이의 구조에 인간과 자연물의 등치라는 주술적 사고가 담겨 있다. <인간-돌>과 <돌-인간>의 전환이 말에 의해 매개된다. 

놀이는 분명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에 놀이의 내용 역시 현실의 내용과 무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놀이공간 안에서 놀이내용은 현실의 내용과 무관한 신성성을 가진다. 놀이내용은 현실과 무관한 추상성을 가져야만 한다. 구체성에서는 중립성이 나오기 힘들다. 추상성에서 나오는 중립성이 보장되어야만 현실에서 서로 대립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놀이를 할수 있다. 

놀이에서 얻는 경험과 놀이내용 및 놀이질서에 담긴 신성성을 인정한다면 놀이는 우리 안에 있는 신성(神性)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신성을 만나는 행위가 된다. 신성한 질서 속에서 약동하는 놀이 공간은 마술적인 신성한 공간 즉, ‘매직 써클’이다. 따라서 놀이생태계는 성역이며, 아동들의 놀이생태계는 어린이들의 성역이다.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동심(童心)은 늘 꾸러기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아동기의 놀이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실낙원이다. 어쩌면 어른들의 삶은 아동기를 꿈꾸는 백일몽 사이사이의 가위눌림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려면 놀이의 신성한 경험과 질서와 내용을 궁구해야 하며 인간이 인간됨을 지켜나기 위해 놀이생태계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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