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놀이에는 종종 깊은 의미가 있다. Deep meaning lies often in childish play.
놀이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차원을 가진다: 활동 ·실체 ·과정 ·원리. 이들 놀이의 4차원은 하나의 놀이에서 서로 겹쳐질 수 있으며 또한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의 놀이를 하나의 차원에서만 파악하면 놀이의 본질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되기 쉽다. 어떤 놀이든지 활동이며 실체이고 과정이자 원리라는 4개의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개별 분과 학문을 통해서 놀이 연구가 어려운 이유는 이러한 놀이의 여러 차원이 연구자 개개인에게 인지되지 않거나 무시되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은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하고 있는 활동이 놀이인지 아닌지 육안으로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 사람은 지금 놀고 있고, 저 사람은 놀고 있지 않다고 쉽게 구분하곤 한다. 게다가 놀이가 아닌 다른 활동, 즉 비놀이 또는 놀이 외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활동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활동은 놀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이것이 놀이의 활동 차원이다.
놀이를 실체라 함은 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의미가 놀이 속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놀이는 그저 단순한 시간 때우기나 무익한 것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매우 중요한 것이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한 마디로 줄여서 하면 놀이는 실체이다라고 할 수 있다. 놀이의 실체 차원은 어떤 경우 직관적으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 장기간의 주의깊은 관찰과 개입을 통해서도 가늠하기 어려울 수 있다.
놀이를 과정이라 함은 놀이 안에 인간의 사회성과 의사소통과 개인의 심리적 경험이 복합되어 있다는 얘기다.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놀이란 일반인들의 통념을 훌쩍 넘어서는 무지하게 복잡한 현상이라는 말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타인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성은 인간의 역사성과 동전의 양면이다.
놀이를 원리라 함은 모든 것이 놀이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한다는 것을 이른다. 한 개인이 태어나서 성장하며 늙어가는 미시적인 수준에서 놀이의 원리 차원이 작용하며, 인류 문명이 움터서 커나가는 초거시적인 수준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에서 놀이는 원리로 작용해 왔으며 작용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놀이를 하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Play keeps us fit physically and mentally.
톰 소여가 벽을 칠하고 있는데 친구 한 명이 사과를 먹으며 가까이 다가온다. 톰은 아줌마가 시킨 일을 고분고분 따르느라 놀지도 못하는 걸 친구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친구 앞에서 모양 빠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이다. 톰은 아주 그럴 듯한 변명을 한다. 재미삼아 페인트 칠한다고.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친구는 나중에는 먹던 사과까지 내주면서 자신이 페인트 칠을 하려고 한다. 왜냐면 재미있어 보이니까. 마크 트웨인은 이 부분에서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기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통찰하였다. 인간은 모든 활동을 놀이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활동activity은 놀이로 전환될 가능성을 가진다. 놀이에는 몸의 근육을 주로 사용하는 것도 있고 머리를 주로 사용하는 것도 있다. 또는 여럿이 모여 하는 놀이도 있고 개인이 혼자서 하는 놀이도 있다. 놀이가 활동이라는 점은 부정 할 수 없다. 놀이를 가장 초보적으로 정의하면 분명히 활동이다. 누군가가 놀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놀이가 아닌 다른 활동, 예를 들어 공부를 하는 것인지는 육안으로 대충의 구분이 가능하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활동이 놀이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현미경이나 엄청난 이론적 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이가 공부보다 열등한 것이요 가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놀이가 활동이라는 인식은 그래서 1차원적이다.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놀이에 대해 1차원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린이들의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부모나 교사나 교장, 정책 담당자들 중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놀이를 그저 저급하고 유치한 활동으로 여긴다. 또한 어린이 인권을 위한 단체들이 적지 않게 있지만, 아동의 놀이할 권리를 어떤 실체로써 인정하고 그 권리를 위해 아동들을 대변할 조직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에는 어린이들의 놀이 권리를 대변하는 조직이 지역단위까지 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중앙조직 하나 없다. 이렇게나 많은 인구에게 그렇게나 절실한 문제를 풀어주기 위한 단체가 전혀 없다는 건 분명 큰 문제다. 이 두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렇지만 또 다른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 영유아의 경우 배변을 하고 걸어다니는 일상 활동 조차 놀이로 인지하게 되는데 이 점을 응용하여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간다. 미국의 국립 놀이 연구소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노동이라는 다양한 활동은 어떤 상황이나 조건 등의 조작을 통해 놀이로 전환될 여지가 있다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학습한 것을 연습할 기회를 준다. Play gives children a chance to practice what they are learning.
놀이는 실체reality이다. 실체라는 말은 그 뜻과는 달리 그다지 확연하게 와닿는 말도 아니고 이해하기 쉬운 말도 아니다. 놀이가 실체라는 얘기는 우선 놀이가 단순한 활동만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놀이의 쾌락, 즉 신성한 경험은 실체이다. 그래서 몸이 한계치에 이를 때까지 쾌락을 멈추기 힘들다. 실체는 보이지는 않지만 의미 있고 중요하다. 밥을 먹고 나서 소화가 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밥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잠을 잘 때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꽤 긴 시간이 지난다. 현대과학이 수면의 메커니즘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지만 잠자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실체를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어린이들에게 놀이는 발달적인 가치를 가진다. 특히 적응이라는 면에서 놀이는 발달적으로 가치가 있다. 어른들이 인위적으로 짜놓은 환경 안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 속에 자란 아동보다 잘 놀면서 자란 아동이 커가면서 이런 저런 상황과 처음 접해 보는 환경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학자들은 ‘놀이는 발달적으로 적합한 실제(D.A.P. developmentally adaptive practice)라고 한다.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있어 언어와 신체와 정서 및 사회적 인지적 능력이 발달하는 데 놀이는 도움이 된다. 이를테면 놀이는 발달의 길잡이가 된다. 아니면 적어도 아이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놀이는 실체다라는 말은 놀이가 중요한 활동이고,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무지하게 중요한 활동이다라고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육아 관련 도서나 잡지에서 놀이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도, 문화행사나 캠프 등의 프로그램에서 놀이가 빠지지 않는 것도, 놀이학교나 유치원·학교 등에서 아동과 청소년을 만나는 이들이 놀이를 중요시하는 것도 모두 다 실체적 차원에서 놀이에 접근하는 것이다. 아동들과 직접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놀이의 실체적 차원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비해, 아동들을 직접 만나고 상호작용해야 하는 교사나 활동가들이 놀이의 실체 차원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놀이의 실체 차원 이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동들의 놀이 행태를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놀이의 실체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잘 논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작업이다. 어떤 놀이가 아동의 발달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담론은 잡지나 단행본이나 광고를 통해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놀이 시간을 늘이기만 할 순 없다.
놀이는 재능을 키우고 협동을 장려한다. Play fosters belonging and encourages cooperation.
놀이는 과정process이며 놀이 과정은 내적 과정과 외적 과정으로 갈린다. 놀이의 내적 과정은 재미와 신명과 즐거움, 흥 그리고 몰입을 의미한다. 한 바탕 신나게 놀 때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정을 ‘파이디아’라고 하는데 이런 감정이나 몰입 상태는 놀이의 가장 근원적인 특성이다. 공부나 일은 재미가 있건 없건 공부나 일이지만, 재미가 없는 놀이는 놀이가 아니다. 외견상 놀이를 하고 있어도 본인이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바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은 그야말로 심각함 또는 진지함 그 자체이다. 그 표정만 따로 보면 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놀이에 몰입한다거나 놀이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꼭 외부에서 관찰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러한 경험이 놀이의 활동 차원과 별도로 발생하지는 않는다. 놀이의 내적 과정 또는 심리적 과정이라고 할 때 놀이의 과정 차원은 활동 차원과 병행되기도 한다.
놀이의 외적 과정은 자발성·자율성·의사소통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골목에 아동들이 몇 명 모였다. 먼저 아이들은 어떤 놀이를 할 것인가 결정한다. 보통은 골목대장 역할을 하는 인기있는 아동이 하자는 놀이가 선택된다. 그 놀이를 얼마나 계속할 것인가, 그리고 놀이를 언제 중단할 것인가 모두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아이들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먼저 내적인 갈등이 일어난다. 어떤 친구가 자꾸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자신을 무시하거나하는 경우가 있다. 혹은 자신이 그 놀이에 익숙치 못해서 자꾸 실수를 하거나 패배하거나 해서 놀이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계속 놀이를 해야 되나, 그 친구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되나하는 내적인 갈등을 겪는다. 불만을 드러낼 경우에 갈등이 표면화된다. 그 갈등은 보통 놀이를 중단시킨다.
그 과정에서 갈등의 양쪽에 있는 아동들뿐만 아니라, 그 갈등과 무관한 아동들은 다양한 전략을 연습한다. 누구를 배제시키고 다른 데서 놀이를 할까, 그냥 집에 가버릴까, 싸우는 친구들을 내버려두고 남은 친구들끼리 놀이를 계속할까, 각자의 친한 정도나 성별에 따라 싸움에 참여하여 싸움판을 키울까, 둘 사이에 화해를 중재할까 등등의 여러 전략들을 연습한다. 놀이생태계에게 가장 이로운 결과는 갈등을 해소하는 협력행위이다. 그러나 전체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화해행동을 어린이들이 배워서 능숙하게 활용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또한 한 종류의 놀이가 끝나고 다음 놀이로 옮겨갈 때, 어떤 놀이를 선택할 지를 결정하는 데는 또한 복잡한 과정이 작용한다. 이러한 놀이과정은 하루에도 여러 번 일어난다.
필자가 동네에서 처음 놀이를 시작할 때는 아동들은 갈등을 무시하는 전략을 자주 선택했다. 사소한 갈등이 생기면 아이들은 대개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떨어져 나갔다. 화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골목놀이가 아니어도 티브이나 전자오락 등 놀거리가 많은데다가 부모가 정해준 여러 일정도 해야 되기에 갈등을 감수하면서 놀이판을 유지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3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아이들은 그만큼 성숙했을뿐더러 골목놀이의 즐거움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우선 갈수록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에는 놀이판을 미련없이 떠나던 친구들이 이제는 집에 가기 보다는 계속 골목에 머물려고 하는 신호였다. 갈등이 자주 일어나면서 중재하고 화해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화해와 협력 행위가 매우 서툴렀다. 차츰 차츰 다양한 전략들을 실행하면서 놀이를 지속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 단위가 아닌 장기간의 놀이 과정에서 더더욱 복잡한 일들이 일어난다. 여태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놀이가 도입되기도 하고 여태 즐겨왔던 놀이가 도태되기도 한다. 어떤 놀이의 규칙에 어떤 문제점이 있을 경우, 규칙을 어떻게 변형·수정·보완할 지에 대하여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면서 같은 놀이도 지역마다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점이 생겨난다.
또한 각 아동의 역할 역시 장기간에 걸쳐서 변화한다. 아동들의 집단에는 늘 리더 역할을 하는 친구가 있고, 터프가이 역할을 하는 친구, 새침데기, 재간꾼, 투덜이, 아웃사이더 등등의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 새로운 친구가 전입해오거나 기존의 멤버가 빠지거나 할 때는 역할 사이의 은근한 갈등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아동기의 긴 시간 동안 한 아동은 깍두기라는 이름으로 놀이생태계에 진입하면서부터 놀이 선배들에게 그리고 같은 또래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서 혹은, 적어도 무시는 당하지 않기 위해 눈물나는 분투를 한다.
놀이과정에서 놀이맥락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 보자. 골목에서 고참 아동인 놀이 선배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다. 이제 엄마의 품을 떠나 동네 친구를 사귀기 원하는 아이들이나 새로운 동네로 이사온 친구들이 옆에서 쭈뼛거린다. 함께 하길 욕망하는 시선을 계속 보낸다. 더불어 놀이하는 사람들의 놀이 분위기(소리&표정) 자체가 놀이 맥락으로써 주변인들에게 인력으로 작용한다. 놀이 그 자체가 놀이지도였다. 새로이 골목에 진입한 깍두기들은 그 과정에서 곁눈질로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배움의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놀이는 인류의 최고 수준의 지성이 전개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Play is the only way the highest intelligence of humankind can unfold.
놀이는 원리principle이다. 유아는 놀이로 세상을 살아간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에 하는 대부분의 일들 즉, 주변을 둘러보고 몸을 뒤집고 엉금엉금 기기 시작하고 첫걸음을 떼고 모국어의 기본을 익히면서 주변의 어른들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파악하는 등등의 모든 것이 유아에게는 놀이다. 이 점을 가장 두드러지게 설명한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피아제이다. 피아제는 ‘동화(同化)와 조절’이라는 말로 인간이 뭔가를 배우고 익혀나가는 심층적인 원리를 설명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음식을 먹는 것이나 외부의 정보를 소화하는 것이 모두 동화이다. 음식같이 물리적인 것이건 물상과 인간의 작동방식같이 상징적인 것이건 상관이 없다. 자신의 몸 밖에 있는 것(외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내부화)이 동화이다. 동화는 외부의 내부화인데, 놀이가 바로 동화란 얘기다. 피아제에 따르면 놀이란 결국 정신과정의 원리가 된다.
아동이든 성인이든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를 두뇌가 소화시키는 작용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놀이 원리이다. 스스로 반복하면서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것을 가장 잘 받아들이게 된다. 요즘의 뇌과학에서는 ‘이론 가설(theory theory)’이라고 한다. 유아나 아동이 스스로에 대해서 차츰 알아가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학습하는 방식이 과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이론을 만드는 방식과 서로 다를 게 없다.
놀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놀이에 대한 이론은 무척이나 다양한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는 놀이 속에서 커나가는 가장 큰 힘이 바로 ‘문제를 발견하고 적시하는 능력’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상당히 많은 변수가 개입한다. 머리도 타고나야 하고,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숙련도, 전략 등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은 분명 놀이를 통해 훌쩍 자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놀이는 외부의 내부화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바깥에 일어나는 문물의 변화와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을 던지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가설을 빨리 세워서 점검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계속 수정하거나 다른 가설을 세워보아야 한다.
놀이의 내면적 원리는 몰입이다. ‘몰입’이라는 상태를 가장 잘 끌어낼 수 있는 활동의 특징은 대체로 ‘일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일 같기도 하고, 놀이 같기도 하지만 놀이라고 하기도 그런’ 활동이다. 아동의 삶은 그야말로 놀이 몰입 교육이다. 놀이는 원리이므로 우선 호기심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삼게 된다. 만약에 어린이들이 일상에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무한한 정보를 부모나 교사 등 타인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한다면 호기심과 자발성은 차츰 손상되어가며 수동적인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사람은 매뉴얼이나 상사같은 외부의 권위에 의존할 뿐 더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할 수 없다. 그 반대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어떤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호기심을 연료삼아 끊임없이 실험하고 시도해본다. 놀이 원리가 심층에서 작용하기에 놀이를 창조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외부 정보를 효율적으로 그것도 몰입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즐겁게 내부화하는 것. 그것이 몰입이자 놀이의 내적 원리이다.
몰입은 어떤 활동의 참여자의 내면적 과정인 심리에 많이 좌우된다. 어떤 보상이나 외면적 동기 없이 호기심에 의해 활동이나 커리큘럼이나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몰입을 위한 첫 걸음이 된다. 몰입이라는 놀이 원리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중요한 활동이나 프로그램이라도 그것을 계발한 사람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여자의 시행착오를 일종의 받침대로 삼는 자기발견적 학습과 비형식적 교육은 놀이를 원리로 삼는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놀이의 원리 차원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바로 ‘터득’이라고 할 수 있다. 터득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그닥 쓰이지 않는 단어인 터(攄)는 흥미롭게도 손 수(手)와 생각 려(慮)가 합쳐진 단어이다. 터(攄)는 ‘펴다·넓게 깔다·벌리다’라는 뜻을 가진다. 확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더불어 터에는 ‘높이 뛰어 오르다’의 뜻이 있다. 여기에는 비약의 이미지가 있다. ‘손’과 ‘생각하다’라는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터’는 펴고 넓게 벌리면서 높이 뛰어 오르는 의미의 연쇄를 가진다. 놀이와 교육 사이에 공통점은 ‘터득’이다. 교육이나 배움에서 놀이라는 원리를 도입하고자 한다면 몰입과 터득이라는 놀이 원리가 실제로 작동하는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