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에 오르에르, 자그마치, 엘씨디씨 등 이름난 핫플레이스를 여러 개 기획한 김재원 대표는 <롱블랙>과의 인터뷰에서 “제 감도의 비결은 어릴 때부터 물건을 많이 사봤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수업료를 많이 지불한 거죠. 우선 경험을 많이 해봐야 내 취향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하던데, 마케터들도 감도를 높이기 위한 투자가 필요해.
제니 홀저라는 유명 작가의 미술 작품 중에는 “Money Creats Taste”, 이 세 단어만 덩그러니 쓰여 있는 게 있어. 돈이 취향을 창출한다는 말이지. 물론 내 말은 돈을 함부로 쓰라는 게 아니라, 허락하는 범위에서 새로운 체험을 많이 하라는 거야. 돈을 써본 마케터와 그렇지 않은 마케터는 체감이 다르거든. 눈으로만 하는 소비가 아니라 내 돈으로 해보는 소비가 필요하다네.
- 브랜드로 남는다는 것 (홍성태), 386쪽
대학생 때부터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보았다. 음식점에서 서빙도 해보고, 음식도 만들어보고, 화장품도 팔아보고, 시민단체에서 일도 해보고 참 다양한 일을 했다. 일 그 자체로도 인생의 경험과 교훈을 느낄 수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일을 통해서 얻은 돈으로 더 많은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돈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기호 혹은 필요가 반영된 재화나 서비스를 화폐를 통해 교환하는 행위가 '돈을 쓴다'라고 불릴터인데, 그 행위는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돈을 쓴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만족이든 불만족이든, 기쁨이든 후회든 돈을 쓴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경험을 얻는다. 그 경험의 질은 반드시 돈의 값어치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적은 돈을 들여서 많은 것을 경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많은 돈을 들여야 이전에 느꼈던 그 소소한 경험을 비로소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디에 주로 돈을 썼고, 그 소비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돈은 내게 무엇을 남겼을까. 지금은 사라진 돈의 자취를 더듬어보며 돈이 내게 남긴 것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이름하야~ 나의 소비 TOP3!
- 덴마크 코펜하겐/로스킬데,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체코 프라하
, 스위스 그린델발트/ 루체른, 스웨덴 말뫼, 노르웨이 오슬로, 이탈리아 로마/피렌체/베네치아
, 포르투갈 리스본/포르투, 스페인 바르셀로나/마요르카, 대만 타이베이/화롄
, 일본 도쿄/오사카/교토/후쿠오카, 필리핀 세부/보홀
적어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20대 초반 대학생일 때 여름과 겨울 방학에는 늘 2달 동안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100~150만원의 경비를 마련해 대만, 일본으로 4박 5일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이 넓은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세상이 존재하는 그 충격과 놀라움이 나를 압도했다. 그 경험 덕분이었을까.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그 갈망이 성장해 25살이 되던 때, 나는 덴마크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내가 가진 경비는 300만원, 비행기 가격 100만원을 제외하면 단돈 200만원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덴마크에서의 워킹홀리데이는 어떠했냐는 지인들의 물음에 나는 늘 같은 답변을 한다." 물리학에는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 특이점을 경계로 그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돼. 나에게는 덴마크 워킹홀리데이가 내 인생의 특이점과 같아. 덴마크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덴마크에 다녀오고 나서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내게 입력하던 사회화를 잠시 동안 배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덴마크라는 낯선 나라에서 '나'라는 개인에게 집중한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오롯이 '나'를 경험하고 다른 외부의 영향을 최소화한 채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여행을 통해 시작한 세상에 대한 관찰이 결국 나를 머나먼 타향살이로 이끌었고, 그 경험으로 인해 나는 비로소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경험 또한 내가 돈을 소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이 소비는 내 인생 최고의 소비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명동으로 갔다. 명동은 당시 내가 살던 곳과 가깝기도 했고 에이랜드, 스파오, 자라, 유니클로 등의 브랜드들이 밀집해 있어 쇼핑하기 최고의 장소였다. 취미로 즐기는 운동도 없고,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친구를 매번 만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그 기분 나쁨을 해소하기 위해 찾은 해방구가 바로 쇼핑이었다. 신기하게도 예쁜 옷을 고르고, 입어보고, 그것을 사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집으로 돌아오는 모든 과정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갈 때는 개선장군의 빛나는 갑옷을 두른 것 마냥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기분까지 느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감정이긴 하지만 당시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무척 컸던 나를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대학생의 일상은 공부보다는 연애에 더 관심이 크므로....)
이쁜 옷을 차려입었다고 끝난다면 그것은 패션을 알지 못하는 사람. 모두가 피하고 싶은 진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다. 그리고 남자 얼굴의 8할은 헤어스타일이다. 나는 참 애매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부스스하고 힘이 없는 곱슬머리이긴 한데 정수리 부분은 직모이고 끝으로 갈수록 지나칠 정도로 곱실거리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 덕분에 미용사분들이 내 머리를 드라이를 하며 당황해하는 모습을 수백 번 보았다. 이러한 환경적 요건을 타고난 덕분에 나는 중학생 시절부터 아침마다 30분씩 드라이기와 고데기를 가지고 헤어 스타일링을 연마했다. 그리고 스타일을 잘 낸다고 하는 미용실이 있으면 굳이 먼 곳임에도 찾아가서 커트를 하고 드라이를 할 때 미용사분께 어떻게 해야 이쁘게 드라이를 할 수 있는지 꼭 물어봤다. 그렇게 계속 수업료를 지불하고 내게 맞는 헤어 에센스, 드라이기, 고데기, 롤빗 등을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내게 제일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최적의 드라이 방법을 알게 되었다.
옷을 사고 머리를 꾸미는 이 2가지 행동 및 소비는 나의 외관을 좀 더 낫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담겨있다. 이 욕망을 추구하며 꾸준히 소비를 한 결과 지금의 나는 내게 잘 어울리는 옷과 헤어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나의 외관을 위해 지금도 꾸준히 옷과 헤어스타일링에 돈을 투자를 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외관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참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늘 깔끔한 외관과 인상을 주는 사람은 그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물 마저 늘 깔끔할 것이라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보여지는 모습의 힘이다. "Don't judge the book by its cover"라는 말이 있지만 책의 표지 디자인에 따라 판매량이 달라지는 현실을 살펴본다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말뿐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27살이 되던 해,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품었다. 하지만 그 꿈을 실행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늦은 나이에 비로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서러움에 몸을 떨었다. 온몸이 그 억울함을 흐느꼈다. 그때부터였다.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돈'이 있어야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구나.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자유로울 수 없구나. 그때 떠올린 이 강렬한 생각은 나를 돈을 향한 차가운 욕망으로 이끌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은 모두 내려놓고 나를 자유롭게 할 돈을 벌기 위해 차갑게 전진했다.
28살이 되던 해, 나는 모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흰 셔츠에 정장바지 그리고 검정구두를 또각거리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유리 건물로 출근을 했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느꼈던 게 기억난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 큰돈을 받고 나니 내가 뭐라도 된 사람인 것처럼 기뻤다. 열심히 일하고 그 일을 통해 번 돈으로 이전에는 풍족하게 느낄 수 없었던 나의 자유를 만끽했다. 참 기분 좋은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그 기쁨도 차츰 줄어갔고,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그 기쁨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통해 얻는 결과물이 더 큰 가치를 지닌다면 그 일을 지속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다른 방법을 모색할 때가 된 것이다. 당시 내가 한 고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통해 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 돈의 크기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얻는 스트레스, 불안, 우울이 훨씬 커져갔다.
29살이 되던 해, 고민 끝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살 수는 있겠지만, 내게는 그 삶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삶을 내가 주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차가웠던 나를 다시 뜨겁게 만들었다. 이전이었다면 할 수 없겠지만 그때의 나는 이전과는 달랐다.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 반동안 일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인테리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하루 공부를 하며, 왜 이제서야 내가 이걸 시작했지 하는 아쉬움과 이루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프로그램을 다루고 이론을 익히면서 힘에 부쳐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붙이며 살았지만 그 입꼬리 끝에는 늘 미소가 담겨있었다.
30살이 되던 해, 인테리어 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배우면서 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일이 재밌으니 일과 삶이 서로 다른 객체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다. 이전에는 출퇴근 시간을 엄격하게 신경 쓰며 살았지만 지금은 11시간을 일해도 일반적인 근로자보다 3시간을 더 일하고 경험하고 배움을 늘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경험이 곧 내 자산이자 능력이었기에 그 시간이 허투루 흐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모든 일하는 시간이 내게는 소중하고 값졌다. 남들이 말하는 천직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찾았다.
인테리어를 시작한 지 벌써 3년 차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이 일이 즐겁다.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이 즐거운 순간보다 훨씬 많긴 하지만 그 스트레스 또한 나의 능력으로 풀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달까. 인테리어를 시작할 수 있어서, 이 일을 지금 할 수 있어서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 모은 그 돈이 없었다면 나는 인테리어를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돈을 통해 나는 내 꿈을 샀다. 그리고 그 돈 덕분에 나는 지금 꿈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