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샨티 May 11. 2021

현상 유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이미 충분한 삶


현상 유지

아침에 일어나 떠오른 단어다.


 

때는 여섯시 반.

아이들은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봄날의 화창한 기운이 맴도는 날씨. 

집안은 고요하고

나는 편안히 깨어있다.





아쉽게 잠들고 
불편하게 깨어나는 일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이십 대 중반까지 잠들기 전에 꼭 기도를 하곤 했는데 날마다 왜 그렇게 회개할 게 많던지...

매주 교회에 가 종교생활을 하니 새사람으로 태어나 상쾌한 삶을 사는 게 상식이건만, 늘 내가 '죄인'임을 자각시켜주는 분위기 속에서 죄책감을 온몸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던 것 같다. 

맨몸으로 세상에 철퍼덕 던져진 느낌으로 무언가 불안하고 두렵고 하던 마음이 회개를 빌미로 나를 달달 볶고 있었었다. (자각한 이후로 교회생활을 살포시 접었다)


호기심 대마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젊은 시절엔 매일 해야 할 리스트를 (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쫙 적어놓고 그걸 다 못하면 화장실 갔다 뒤처리 못 한 기분으로 잠들곤 했었다. 

나는 부족해 보이고 남의 떡은 한없이 커 보였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은 '업글 인간'의 성향이 어디 가도 따라다녀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반성의 눈길로 바라보게 본다.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은 쌓여있었고,

빼야 할 뱃살은 몇십 년째 이질적으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고,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짬뽕으로 뒤섞여 우선순위를 고이고이 매기며 겨우 몇 개씩 해나가고 있다. 






오늘도 이 정도밖에 못 했네, 그냥 놀아버렸네 하며

당근 대신 채찍으로 스스로를 갈구며 잠드는 밤과

찌뿌둥한 느낌으로 일어나는 아침,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바꾸고 싶어

고개를 흔들며 '아니야, 나 잘 살고 있거든'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 현상 유지...?
...현상 유지...!
...
그래, 현상 유지만 해도 충분하다.

매일 지겹도록 해먹는 밥으로 나는 움직이는 힘을 얻고 아이들은 몸집도 커지고 마음도 자라나고 있다. 

날마다 하는 일 덕분에 의식주를 이어갈 돈도 생기고 아이도 키우고 사회에 공헌도 한다. 

매일 밤 잠자고 쉴 수 있는 이 집이 있어서 비바람 피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 

익숙하게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있어서 또 얼마나 편리한가. 

늘 바라볼 수 있는 자연이 있어 깨끗한 공기로 숨 쉴 수 있고, 

숨 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자연스럽게 호흡할 수 있어 나는 살아서 활동한다. 

...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으니

이미 충분하고,

잘 하고 있고,

그래서

감사할 일이다.

매일 보는 들꽃의 아름다움처럼


자전거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은

일상적으로 페달을 구르고 있는 두 발이 있기 때문이다. 

도착지까지 가는 것에만 집중하면

속도가 제대로 나지 않는 내 자전거가 싫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자전거를 세우기 위해 힘차게 뻗고 있는 내 다리가 있고

두 발을 구르고 있는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다. 

페달의 운동이 안정적으로 유지된 이후에야 목표를 정하여 조금 나아갈 수 있다. 

일상의 탄탄한 '현상 유지' 

성장 지향적인 기질은 타고난 성향이니 인정한다. 

그걸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현상 유지'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자. 

그리고 가끔은 페달을 멈추고 자전거를 세워둔 채

주변을 돌아보며 편안히 쉬어가도 괜찮다. 


킁킁 대고 맡는 아이의 달달한 내음, 
매일 해먹는 단조로운 밥상,
몇 명의 좋은 사람들, 
손에 잡히는 뜨개질,
대충 읽어도 좋은 쉬운 책,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산책, 
놀이터의 노는 소리, 
밤중 소쩍새의 울음, 
아이와 그림책 쌓아놓고 읽는 시간, 
마음 가는대로 그림 그리기,
커피 한 잔, 
...
그리고
깊은 호흡.
 


편안히 하는 뜨개질도        현상유지의 시간                                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햇밤 줍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