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샨티 Dec 01. 2023

쪽염색 하던 날

풀에서 용서를 배우다

한없이 푸른 하늘을 비유할 때 '쪽빛 하늘'이라고 말한다. 쪽빛 하늘의 그 '쪽'을 직접 본 적 있을까? 


쪽은 시골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뀌'와도 닮은꼴인데, 처음 보면 그냥 스쳐 지나갈 정도로 평범한 풀이다. 이런 들풀에서 청색을 뽑아내다니, 처음 쪽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했고, 쪽 염색을 한 파란 천들을 구경할 때마다 고운 빛깔에 감탄하곤 했었다.



이십 대 귀농시절 농사학교에서 '쪽'을  재배해 봤다. 동기 한 명이 쪽 염색을 한다고 씨앗을 구해왔다. 반가운 마음에 같이 농사를 지었다. 쪽은 생명력이 강한 풀이라 씨앗을 뿌려 싹이 올라오는 확률인 발아율이 무척 높았다. 밭두둑을 만들어 봄에 심었더니 싹이 무수히 돋았고, 뜨거운 여름이 되자 잎사귀는 무성해져 밭은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늦여름의 어느 날, 숫돌에 싹싹 갈아둔 낫을 들고 쓱쓱 베어 한 아름씩 수확했다. 쪽염색은 석회와 함께 발효하는 과정을 거쳐야 특유의 푸른 청색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조개껍질 성분인 석회 가루와 섞어 들통에 넣었다. 코를 쥐어박는 고약한 냄새가 났지만, 이후에 만날 푸른빛을 상상하며 열심히 막대기로 저었다. 


봄부터 시작한 쪽농사, 여름을 거쳐 가을이 되었고 이제 천을 넣고 주무르는 마지막 한 단계만 남았다. 하지만 그 사이 농사학교 동기와의 관계가 멀어져 두 사람 모두 쪽이 발효 중인 들통으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렇다. 그는 나의 전 남친이었다.) 나의 첫 쪽염색은 까맣게 썩어가는 들통 속에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가 과거에 만들어 내 목에 둘러줬던 짙은 청색 쪽 스카프는 스위스에서 온 친구의 트렁크에 실려 외국으로 가버렸다. 미숙했던 청춘이었다.





한번 풀지 못한 숙제는 시절을 타고 다시 눈앞에 발현된다. 가을 풀학교의 첫 주제가 '쪽 염색'이었다. 내심 반가웠다. 십 수년 전 시궁창에 박혀있던 기억을 꺼내서 깨끗하게 세척해 줄 수 있는 기회. 


쪽염색은 발효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풀학교 대표님께서 알려주신 방법은 '생쪽 염색'이었다. 당일 채취해서 당일 끝내는 신속정확한 과정. 하루 만에 쪽빛을 볼 수 있는 급성 처방전이었다. 이런 염색법도 있었다니! 세상은 넓고 방법은 참 많다. 


9월 초 여름을 마무리하는 비가 살포시 내리는 중에 쪽염색이 시작되었다. 동네 어귀에 돋아난 쪽 새싹을 보고 조금 가져와 옮겨심기한 것이 밭 한쪽을 가득히 차지했다고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쪽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어떻게 보면 바질의 싱싱함도 보이고, 한편으론 들풀의 질긴 생명력도 보이는 쪽. 


먼저 채집가위를 들고 잘 기른 쪽을 수확했다. '싹둑 싹둑' 자르기 시작하자 수렵채집인의 세포가 꿈틀거렸다. 자연 속 야생열매를 따고 들풀을 채집할 때마다 고대적 쾌감이 피를 타고 흐른다. 쪽 한 바구니 가득 채우는 동안 만족감과 풍요로움도 듬뿍 차올랐다. 소소한 바구니가 명품백으로 둔갑하는 순간. "너무 좋다" "진짜 행복해" 추임새가 흐르는 비 사이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쪽을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갓 딴 싱싱한 들풀이 초록 스무디로 변했다. 되직하다 싶으면 물을 조금 넣어주면 되었다. 아래에 큰 통을 놓고, 양파망 가져와서 곱게 간 쪽을 넣었다. 초록 물이 통으로 흘러나왔다. 생쪽염색의 가장 큰 비밀인 '얼음'을 가져와서 적당량 부었다. 염색이 잘 되려면 온도가 차가워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여름 끝무렵에 시원하게 하기 좋은 염색이 생쪽염색이라고 한다. 


고무장갑 끼고 천을 담그고 박박박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얀 천에 서서히 스며드는 초록빛. 맑게 푸르렀다. 고무장갑 낀 손들이 흥겨워졌다. '와' 감탄소리와 '까르르' 웃음소리와 함께 통이 신나게 흔들렸다. 



초록이 충분히 베어든 천을 꺼내 공기 중에 두니 새로운 마법의 시간이 펼쳐졌다. 햇볕과 공기와 만난 염료가 '청색'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천연염색에는 색을 천에 고정시키는 백반이나 철 등의 '매염제'가 필요한데, 생쪽염색에서는 '햇볕'이 매염제였다. 세상에나, 햇볕이 푸르름을 더 짙게 해 준다니,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설레었던 '쪽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푸른색'을 내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갈색빛, 붉은빛, 노란빛을 내는 염료들은 많이 있어도 이 정도의 청색을 내는 재료는 '쪽'이 유일한 것 같다. 쪽을 발효시켜 염색하면 더욱 짙은 푸른색을 볼 수 있겠지만, 그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생쪽염색으로도 충분했다. 풀과 물, 햇볕, 그리고 적당한 인간의 수고가 보여주는 푸르디푸른 색깔 앞에 감탄했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벅차올랐다. 







과거의 응어리졌던 시간을 쪽빛에 담궜다. 청년 시절 마침표를 찍지 못한 쪽염색의 기억, 미숙해서 아쉬웠던 인연, 그리고 그 이후 주기적으로 펼쳐진, 잘하고 싶었지만 끝을 보지 못한 모든 순간들을. 마지막 한 조각이 부족해서 완성하지 못한 퍼즐...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자다가 이불킥 하게 만드는 사연까지. 


꾸깃꾸깃 숨기고 감춰서 들통에 박아뒀던 마음을 꺼내 맑고 푸른빛에 휘휘 저었다. 햇볕에 고이 널었다. 눈 깜빡일 때마다 푸른빛이 진해졌다. 거대한 푸르름 속에 녹아들었다. '그 때는 그 때 나름의 최선이었다. 수고했다. 애썼다.' 나를 진하게 안아준다. 


천연의 아름다움은 나와 우리를 해방시킨다. 자연이 주는 치유라고 믿는다. 쪽빛 하늘의 진짜 '쪽빛'을 나눠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