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재의 딜레마
세상 참 살기 힘들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파구는 보이지 않고, 점점 더 꼬여만 간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답이 없다. 대학은 취업난이고, 기업은 구직난이다. 노력만으로는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누구도 멈출 수 없다. 멈추면 낙오자가 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우리나라만 했던 것은 아니다. 1968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UCSB) 개런 하딧 교수는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공유지의 비극"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개인들이 노력할수록 세상은 더 나빠진다. 닫힌계(closed system)에서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딘 교수는 공유지에서 양을 키우는 목동의 예를 들었다.
100마리의 양을 키울 수 있는 공유지에 양을 키우는 목동은 양 한 마리를 더 키우기로 결정한다. 도시로 나간 자식을 위해 돈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양의 수를 늘린 목동의 수입은 올라간다. 이웃집 목동도 양의 숫자를 늘린다. 그리고 그 옆 이웃집도 따라서 늘린다. 결국 늘어난 양때문에 마을 주변의 방목지는 훼손되고 양들은 더 이상 먹을 풀이 없어 굶주린다.
개인의 관점에서 양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렇지만 닫힌계에서 이런 행동은 재앙을 초래한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할 경우 목초지는 양들로 넘쳐날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합리적인 선택은 과밀방목과 공유지의 훼손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이와같이 개개인 단위에서는 바람직한 의사 결정이지만 전체적으로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사실 우리 자유를 제한하는 많은 정책의 정당성은 이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고기 남획, 산림남벌, 환경파괴 등 눈에 잘 띄는 환경문제는 공유지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문제는 좀 더 복잡하고 합의에 다다르기도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이 대표적이다.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노력한다. 삶이 피폐해질 때까지 모두가 노력하지만 우리나라 대학생의 평균 학력이 더 상승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이로인해 일자리가 더 늘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학생들에게 더 노력하라고 충고한다. 노~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말한다. 누구도 먼저 멈출 수 없는 죄수의 딜레마가 작동한다.
우리나라가 성장하는 동안 - 풀밭에 풀이 넘쳐나는 동안 - 은 노력이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그렇지만 성장이 멈춘 뉴 노멀(new normal) 세계에서는 노력할수록 상황은 더 나빠진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노력이 성공과 동의어였지만, 청년들에게 노력은 절망과 동반자다.
노력의 양이 아니라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 함께 공존을 고민해야 할 때 여전히 과거의 성공방식에 목을 매고 있다.
청년들에게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이 "당신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오늘날의 기성세대는 그저 좋은 시절을 살았을 뿐이다. 반면에, 청년들에게는 서로의 공존이라는 더 큰 숙제가 남았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지혜가 더 필요해졌다. 어른들에게선 배우지 못한 가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