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 바탕을 둔 미래 예측
모델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즉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형태로 일어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말은 과거와 다르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좋은 슈퍼컴퓨터를 쓰고 복잡한 수식을 적용해도 모델이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평균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집중호우나 돌풍 같은 돌발기상은 일기예보가 예측하기 힘든 분야이다. 기상 예보관들의 감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슈퍼컴퓨터의 성능과 모델의 정교함도 중요하지만 경험 있는 예보관들의 역할도 결코 무시될 수 없다.
모델이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면, 시나리오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시나리오를 사용한 접근법은 과거의 자료에 바탕을 둔 모델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의 변화를 추정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뛰어난 예보관이라면 한 가지 기상 자료를 보는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날씨 변화에 대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맴돌 것이다. 어떤 시나리오를 채택하고 예보할지는 수치예보모델이 제공해주는 확률과 함께 시나리오 별로 나타나는 날씨 지표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나리오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우수한 예보관으로 성장한다.
헌데 우리나라는 예보관들이 경험을 쌓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순환보직이라는 제도의 문제도 있지만, 이런 일에 종사하는 예보관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기 때문에 오래 근무하기 어렵다고 한다. 기상청 사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예보관들의 애환들을 들은 후부터는 일기예보를 보고 준비한 야회 행사가 갑자기 내린 비로 취소되더라도 기상청에 전화해서 따지고자 하는 마음이 많이 줄었다. 가끔 일기예보가 틀리더라도 '슈퍼컴퓨터로 스타크래프트나 하냐"는 비아냥거림은 좀 자제하면 어떨까? 어디든 그렇지만 질책보다는 격려가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낼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는 또한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노력과 비용을 추정하는데도 사용된다. 대기 중의 온실가스 농도를 가정하고, 이 농도가 초래할 기후변화의 폭과 영향을 예측할 수 있다. 이 결과로 나타나는 기후변화의 영향과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추가되는 비용을 비교함으로써 가장 최적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준다.
기후변화 영향을 보다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미래 어느 시점에서의 온실가스 농도, 에어로졸, 대기오염물질, 토지이용, 지표면 피복 등 다양한 물리적인 인자들을 시나리오에 포함한다. 그리고 경제 상황, 인구증가율, 기술발전 등 사회․경제적 인자들도 사용한다. 이러한 예측치들은 불확실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한 가지 시나리오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여 다양한 경로의 시나리오가 제시된다. 연구자는 분석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이에 따라 결정된 값을 기후모델에 입력한다. 기후모델은 이 예측값을 바탕으로 연산을 수행하여 미래의 어느 시점의 기상 값을 출력한다. 미래의 기후 예측도 지금 시점에서 추정하는 시나리오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렇듯 시나리오를 사용하여 분석하는 방법은 추정 값을 사용하여 또다시 추정된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수많은 불확실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연구자들이 기후변화 영향을 과장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연구자들이 연구비를 획득하는 데는 기후변화 영향을 과장할수록 유리한 것도 사실이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전 세계 기후변화 관련 과학자들의 합의기구인 IPCC [1]에서 제공한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온실가스 배출 시나리오를 통해 미래의 온실가스 농도를 추정한다. 온실가스 배출량은 경제성장, 인구증가, 기술발전 등에 좌우되기 때문에, SRES [2]에서는 사회경제모델을 만들었다. 경제 우선(A)과 환경우선(B), 세계 보편주의(1)와 지역주의(2)로구분하고 네 가지 사회 유형(A1, A2, B1, B2)으로 나누어 배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A1 시나리오는 고성장 사회를 가정한 시나리오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을 가정한다. 인구는 21세기 중반까지 증가하고 신기술과 에너지 효율화 기술이 급속히 도입되는 미래 사회를 가정하는데, 어떤 에너지원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다시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A1F1 그룹은 화석 에너지원을 중시하는 사회, A1T는 비화석 에너지원을 중시하는 사회, A1B는 각 에너지원의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를 가정한다. 각 시나리오 별로 추정한 이산화탄소 농도는 2100년에 각각 970 ppm [3], 540ppm, 720 ppm에 도달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A2 시나리오는 다원화 사회로서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경제나 정치는 블록화 되어 무역이나 인력과 기술의 이동이 제한되며, 경제성장률도 낮고 환경에 대한 관심도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를 가정한다. 2100년의 이산화탄소 농도는 830 ppm 정도에 도달하게 된다.
B1 시나리오는 지속 발전형 사회 시나리오로서 지역 간 격차가 적고 환경 보전과 경제발전이 양립하는 사회를 가정한다. 이 시나리오가 추정하는 2100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550 ppm이다.
B2 시나리오는 지역 공존형 사회 시나리오로 인구와 경제성장이 A1과 B1사이의 중간 정도이고 환경 문제 등은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을 도모하는 사회로서 2100년 이산화탄소 농도는 600 ppm 추정되었다.
IPCC 5차 평가보고서에서부터는 SRES 시나리오 대신 대표농도경로(RCP,Representative Concentration Pathways) 시나리오에서가 사용된다. SRES 시나리오는 사회경제모델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 시나리오에서 제시한 수치를 기후모델에 적용해서 미래 기온이 얼마나 올라갈지, 강수패턴은 어떻게 변화할지 등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도출했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데만 3~4년 정도 걸렸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기후변화 영향, 적응, 취약성 평가를 실시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RCP 시나리오에서는 사회경제모델을 설정하는 대신에 기상학적으로 대기가 온실가스에 의해서 받는 에너지의 양, 즉 복사강제력으로 기준을 정했다. 지표에 도달하는 태양 에너지 양은 240 W/m² 정도이다. 이는 1 m2의 표면에 60W짜리 전구 4개가 비추고 있는 양 정도이다. 이러한 에너지 평형상태에서 온실가스로 인한 복사강제력이 8.5 W/m², 6.0 W/m², 4.5 W/m², 2.6 W/m² 더해졌을 때를 가정하여 서로 다른 4가지 경로를 제시하고 있다.
① RCP 8.5는 현재의 경제발전 추세를 지속할 경우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로 2100년의 태양 복사에너지는 8.5 W/m²가 더해지는 것을 가정한다. 이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940 ppm 추정되었다.
② RCP 6 시나리오는 태양 복사에너지 6 W/m², 이산화탄소 농도 670 ppm이다.
③ RCP 4.5 시나리오는 4.5 W/m², 이산화탄소 농도 540 ppm에서 안정화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RCP 6와 RCP 4.5 시나리오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노력들이 어느 정도 수행되었을 때 실현 가능한 경로이다.
④ RCP 3-PD2시나리오는 태양 복사에너지 ~3 W/m², 이산화탄소 농도 420 ppm을 가정하는 시나리오로 인간의 활동에 의한 영향을 지구 스스로가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여 제시한 경로로 현실적으로는 실현되기 어려운 시나리오이다.
기후 학자들은 이렇게 제시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기후모델을 사용하여 미래의 기후변화 영향을 평가한다. 각 시나리오 별로 제시된 온실가스 농도를 사용하여 평균기온의 상승 정도를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평가한다. 끝으로 인간에 대한 영향을 평가하여 수치적으로 계산해내는 것이 오늘날 기후변화 영향을 분석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우리 가보게 되는 기후변화 관련 뉴스의 대부분의 이런 가정 하에서 만들어진 결과물들이다.
대부분의 언론은 기후변화 영향을 심각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RCP 8.5 시나리오가 만들어 내는 암울한 결과를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연구비가 필요한 과학자들도 RCP 8.5 시나리오를 강조한다. 정치인들은 기후변화에 대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크기 때문에 RCP 4.5나 RCP 6 시나리오가 훨씬 더 높은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RCP 8.5 시나리오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지구 생태계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기후변화 시나리오 중 어느 것이 현실이 될지는 각 국가가 선택하는 개발 방향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결과에 따라 어느 시나리오가 추정하는 미래가 현실이 될지가 결정된다. 지구촌은 과연 희망적인 시나리오를 써나 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다.
[1]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ntergovernmentalPanel on Climate Change, 약칭 IPCC)은 국제 연합의 전문 기관인 세계 기상 기구(WMO)와 국제 연합 환경 계획(UNEP)에 의해 1988년 설립된 조직으로, 인간 활동에 대한 기후 변화의 위험을 평가하는 것이 주 임무이다.
[2] IPCC 배출 시나리오에 관한 특별보고서(IPCC, 2000)에서 설명된 시나리오를 말한다. SRES 시나리오는 크게 4개 시나리오(A1, A2, B1, B2)로나뉘며, 인구통계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을 다루고 있다..
[3] parts permillion의 약자로 백만 분의 일을 의미한다.
* 표제부의 이미지는 NOAA의 GFDL 모델에서 추정하는 해양의 온도변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http://www.gfdl.noaa.gov/model-development에서 인용하였다.
* 본 글은 "기후대란 - 준비 안 된 사람들"에 나오는 일부를 편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