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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Nov 17. 2016

원칙, 균형감, 그리고 착각

유턴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강을 따라 산 언저리를 깎아 만든 길이었다. 내비게이션에서는 좌회전을 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그런데 거리가 좀 헷갈렸다. 여기서 아니면 다음 길목에서... 이런 고민을 하는 찰나, 내비게이션에서는 "재탐색 중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들렸다. 이어서 10여 킬로미터를 직진하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한적한 길을 따라갔다. 강에서는 래프팅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보였다. 산속 리조트에서 열리는 행사까지 시간 여유는 충분했다. 두세 개의 마을을 지났다. 차창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즐거운 드라이브였다. 이런 생각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여행이란 이런 의외성을 만나는 거지. 아마 내가 모르는 새로운 길이 있는 모양이지!!


드디어 면 소재지 규모의 마을이 나왔다. 갈림길도 보이고 면 사무소도 보였다.  내비(Navi)는 면 사무소 앞 작은 광장을 따라 유턴을 지시했다. 문득~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동차는 방금 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또다시 10여 킬로미터를 달려가자 놓치고 지나온 다리가 오른쪽에서 보였다.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약간 일찍 도착해 느긋하게 차 한잔 하겠다는 소박한 꿈은 날아가버렸다.


교통 법규를 지켰다는 자부심, 그런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내비는 알고리즘에 따라 일처리를 했다. 노란색 실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켰다. 나는 절대 가볼 것 같지 않던 아름다운 시골마을을 보는 행운도 누렸다. 그런데 뭔가 뒷맛이 께름칙하다.


두 줄의 노란색 실선으로 그려진 둥근 원 속에서 내비(Navi)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굶으면서도 노란색 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법규만 계속 되뇌고 있어야 할까.


가끔 그런 사람들을 본다. 그땐 이렇게 외치고 싶다.


우린 내비가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다.



영점 조정


실험실에서 무게를 달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저울의 영점을 잡는 일이다. 공인된 무게의 추를 저울에 올리고 검정을 한 다음, 시료 담을 용기를 올리고 저울을 다시 영(0)으로 맞춘다. 그런 다음 시료를 담고 무게를 측정한다.


이미 물건이 실려져 있을 때는 어떻게 할까? 얼마 전에 방문한 팜 오일 공장의 예를 들어보자. 공장에 들어올 때 트럭에는 이미 팜이 가득 실려 있다. 그러니 여기서는 영점을 좀 다르게 조정한다. 먼저 '팜+트럭'의 무게를 달고, 짐을 비운 후 나갈 때 다시 '트럭'의 무게를 측정한다. 팜의 무게는 그 차이이다.


팜(Palm)의 무게 = (팜+트럭) - 트럭


균형감이란, 내 것을 측정할 때와 남 것을 측정할 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내 것은 트럭의 무게를 포함하고 남의 것은 트럭의 무게를 빼고 짐의 무게를 측정한다면 공정하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영점도 잡지 않고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들을 수시로 본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특히 (일부) 교수들이 왜 그런지 도대체 모르겠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영점 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F-15 전투기 @Pixbay


버티고


10년쯤 전이었다. 야간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던 최신예 전투기 F-15K가 바다에 추락했다. 원인으로 버티고(Vertigo)가 언급되었다. 정말 버티고 때문이었을까, 그건 명확치 않은 듯하다. 사고의 원인을 밝혀 줄 블랙박스를 찾지도 못했고, 두 명의 파일럿이 동시에 버티고를 경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란 음모론도 있었다.


전투기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내가 더 놀란 것은 버티고가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F-15K 사고가 나기 1년 전쯤인 2005년 서해와 남해상에서 야간 비행훈련을 하다가 각각 추락한 공군 F-4E와 F-5F 전투기의 사고 원인은 조종사의 ‘비행착각'(vertigo·버티고)이라고 공군이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버티고에 의한 비행기 추락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버티고(vertigo)란 야간 비행 시 일어나는 조종사의 '비행착각' 현상을 말한다.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고 뒤집힌 채로 비행하는 현상이다.


조종사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몇 바퀴 돌다 보면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기 힘들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비행기가 뒤집어진 '배면비행'을 하면서도 감각은 여전히 위는 하늘 아래는 바다로 착각한다. 조종간을 당겨 창공으로 상승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바다로 추락하게 된다.


버티고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비행기에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조종사를 훈련할 때는 자신의 감각보다는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기계는 착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성적으로는 계기판을 따라가지만 본능적으로는 자신의 감각을 따라갈 때 사고가 발생한다.


우리가 믿는 정의는 어떨까. 하늘과 바다를 제대로 구분하고 있는가. 이성과 감각 중 어는 쪽을 더 신뢰하는가. 지식인들 중 너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확신에 차서 하는 분들을 가끔 본다. 어떠한 증거를 들이밀어도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는다. 버티고다.



살다 보니 원칙(原則)이란 게 무조건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골길에서 횡단보도를 찾기 위해 마을까지 돌아갈 필요는 없듯이. 또 경중(輕重)을 가릴 때는 영점을 잘 잡는 게 기본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공정하다 하다 생각해도 불공정해 진다. 그리고 계기(契機)가 이야기하는 게 자신의 감각과 다를 때는 감각을 너무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감이 아니라 증거를 따라야 한다.


최악은 버티고 된 감각과 영점 없는 균형감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원칙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있냐고? 너무 많이 본다. 이 글도 그런 사람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쓴다. 인생을 몇 바퀴 돌아본 분들 사이에서 더 많이 본다. 추락할 때까지 해결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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