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안전한 배는 항구에 매어져 있는 배다.
그렇지만 배는 항구에 매어져 있기 위해 만들어지진 않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뭘까?
아마도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 게다.
아니 다 끝이 난 다음 왜 그랬냐고 훈수나 드는 것이다.
실패는 무능이 되고 훈수는 기품이 된다.
부러운 게 있었다.
그건 참 점잖은 사람들이다.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들은 그럴만해서 그런다.
그런데 그럴만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다.
시도보다는 평론을 택한 사람들이다. 의미 있는 실패를 못해본 사람들이다.
가끔 머리를 쥐어뜯거나, 한숨을 크게 쉬거나, 때론 갑자기 이불 킥을 날리기도 한다.
내가 했던 창피당한 일들, 내가 했던 시도가 좌절로 끝났을 때
그 기억은 가벼이 사라지진 않는다.
대뇌시상하부피질 시냅스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자율신경계 반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불 킥은 조건반사 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깊은 사고를 동반한다.
하나의 글을 통해 사고는 깊어진다.
때로는 그글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해석으로 인해, 또 그로인해 내 글이 어떻게 읽혀 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내글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지도 깨달아간다. 그래서 또 배운다.
그렇지만 글을 쓰지 않고 어떻게 더 깊은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듯 아무 시도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존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실패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현명하다고 존경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행동에 따르는 필연적 실패, 새로운 시도는 항상 실패와 동행한다.
그 새로운 시도 덕분에 최소한 한 가지는 배운다.
좀 더 공부해야겠구나, 좀 더 노력해야겠구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실패에 대한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수십 년 전의 일들도 어제 일처럼 문득 떠오른다.
단발마로 내지르는 탄성, 화장실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수치
새롭게 시도한다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새롭게 시도해야 한다.
현재의 존재는 과거의 성공과 실패의 결과이지만, 과거의 고수가 가져온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시도하고 좌절하고, 창피를 무릅쓰고 도전하는 것
그렇게 또 한발 더 나아간다.
현재의 고통 속에서 내일의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