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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ul 03. 2017

할흐골, 역사의 흐름을 바꾼 전장

몽골 도르노트 할흐골 전승기념탑 방문

몽골의 할흐골, 할하강이 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지역으로 몽골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변방이다. 최근에 여인숙이 하나 생겨서 그나마 풍찬노숙은 면했지만... 관광지로 아직 추천할 곳은 아니다. 그렇지만 몽골인들에게 할흐골은 약간 다른 의미인 듯했다.


이곳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은 할힌골(Khalkhin gol) 전투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노몬한 사건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때까지 세계 전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39년 8월, 몽골 초원이 한참 푸르를 때 시작된 일본 대 러시아-몽골 연합군 간 대전투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할흐골에서 바라보 전승기념탑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이 바뀌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1,04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할흐골 군은 크기가 2만 8천 k㎡에 달한다. 남한 면적의 약 30%에 달하지만, 인구는 3천 명이 조금 넘는다. 인구 밀도로는 환산하면 약 0.11명/k㎡로 사람 구경하기가 참~ 힘든 곳이다. 오히려 길을 가다 가젤 떼나 늑대를 마주칠 가능성이 더 높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초이발산으로 무려 400 km가 떨어져 있다. 초이발산에서 이곳 할흐골 까지는 다리미로 땅을 펼쳐놓은 것 같이 평평한 스텝(steppe)이 펼쳐진다. 몽골인들에게도 이 할흐골 평원은 낯선 풍경인 듯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기 2년 전 역사의 흐름을 바꾼 할힌골(Khalkhin Gol, 영어명) 전투가 시작되었다.


할흐골 군 소재지에서 폐허가 된 건물


할힌골 전투의 배경


일본과 러시아는 태평양의 맹주가 되고자 오랫동안 경쟁해오고 있었다. 1904년부터 1905년까지 계속된 러일전쟁에서 일본 함대는 대마도 인근 해역에서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해전에서 승리했다. 육상에서도 일본군은 봉천 전투에서 우세승을 거두면서 기세를 드높였다. 그렇지만 일본군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양국은 미국의 중재 하에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한다.


그렇지만 일본은 다시 북방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러시아 내전 동안 힘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시베리아 일부를 점령(1918년)한다.  그렇지만 일본의 모험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1922년 내전을 끝낸 소련이 일본을 압박하면서 일본군은 소련의 영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31년 일본은 세계 경제공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불만에 가득 찬 일본의 관동군은 본국의 승인 없이 다시 북상해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웠다. 이는 소련을 자극했다.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극동으로 이르는 유일한 통로인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일본의 공격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느꼈다.


반면에 일본 역시 러시아가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1930년대부터 러시아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일본은 러시아 잠수함이 일본의 해상물류를 저지하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러시아 폭격기들이 일본의 배후를 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할하강(2017년 6월), 가뭄이 계속되어 물이 많이 줄었다.


일본에는 두 가지 전략적 선택이 있었다. 일본 군부 내 북진 그룹은 - 육군의 지원을 받는 -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바이칼 호수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반면에 남진 그룹은 - 주로 일본 해군의 지지를 받았는데 - 유럽 열강들처럼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시기 러시아와 일본 모두 아시아로 팽창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흘렀다. 러시아는 1936년에 결성된 반공산주의 연합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독일과 일본의 반공산주의 연합은 후에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크로아티아, 헝가리, 핀란드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역시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대동아공영을 부르짖고 있었다. 또한 시베리아의 지하자원은 포기하기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할흐골에서 바라본 언덕, 지금은 전투의 잔해는 치워지고 농기계 잔해만 볼 수 있다.


일본, 중국과 몽골을 침략하다.


1937년 일본에서는 북진 그룹이 우세를 보이던 시기였다. 1935-37년 동안 스탈린은 군부 장교들을 대규모로 숙청했다.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중국을 침략했다. 이 시기 중국은 내전에 휩싸여 있어 제대로 된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이 침략으로 일본은 상하이와 북경을 점령했고 수백만의 중국인들을 학살했다.


일본과 독일에 둘러싸인 러시아는 중국과 협약을 맺고 자금과 군대를 지원했다. 1937년 450명의 전투기 조종사와 225명의 정비사가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렇지만 진짜 중요한 일은 몽골의 스템에서 벌어지게 된다.


1938년 7월-8월 사이, 일본과 러시아는 계속해서 몽골-만주 국경에서 부딪힌다. 하늘과 땅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39년 6월 말에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톰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항공기 100여 대가 파괴되었다. 러시아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일본을 제압하고 아직 논란이 많은 몽골-만주 국경을 확실히 하고자 했다.


일본 역시 러시아와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총공격을 결정한다. 이때 일본은 할흐골을 전장으로 택하게 된다. 1939년 5월 일본군은 할흐골(일본에선 노몬한, Nomonhan으로 부른다)을 점령하고 러시아에 도전장을 던진다. 일본의 관동군은 "영리한 도살자가 닭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공격으로 러시아를 압박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동몽골, 산 하나 보이지 않는 광활한 초원지대


할힌골 전투의 전개


소련의 군사령관은 그 당시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42살의 게오르기 쥬코프(Georgy Zhukov) 장군이었다. 쥬코프 장군은 스탈린의 피의 숙청을 벗어나 극동으로 겨우 피신해 있는 상태였다. 쥬코프 장군 휘하에는 50,000명의 보병, 216문의 화포, 498대의 장갑차량(탱크 포함)이 있었으며, 581대의 항공기를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받았다.


1939년 8월 20일 쥬코프는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한다. 먼저 200대의 소련 폭격기가 일본군 진지를 폭격했다. 폭격기가 물러나면 이어서 포병의 포격이 이어졌다. 포격은 거의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 사이 다시 무장을 완료한 폭격기들이 두 번째 폭격을 시작했다. 항공기의 폭격이 끝난 후 쥬코프는 모든 포병화력을 일본군 종심에 집중했다. 이 집중 포격은 15분간 계속됐다.


Zhukov 장군과 몽골의 초이발산(좌), 할하강을 건너는 러시아 탱크(우). Source: wikipedia.org


작가인 골드만(Stuart D. Goldman)은 할흐골 전투를 다룬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술했다(2).  "일본군은 그들이 파놓은 참호에 갇혀 공중폭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초당 2-3발의 포탄이 쏟아졌고,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이 폭격과 포격으로 일본군 포병이 무너졌다. 뒤이은 러시아 탱크의 진격에 관동군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는 "뱀의 혀처럼 붉은색 다트가 날아"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일본군 포병사령관은 그 폭격을 "지옥에서 울리는 징소리"로 묘사했다.



관동군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패닉에 빠졌다. 물이 떨어진 일본군은 군용 차량 라디에이터의 물을 빼서 마셨고, 정작 후퇴해야 할 때는 차량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서 러시아 보병은 일본군의 종심으로 진격했고, 탱크들은 측면을 돌파했다. 전투 11일째 되는 날, 일본군 주력은 거의 괘멸되었고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일본군의 극히 일부만 겨우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뒤에 낙오되어 포위된 일본군은 러시아의 폭격과 포격에 의해 대부분 전사했다.



전투에 패배한 일본의 후유증


그해 9월 16일 일본과 러시아는 종전에 합의한다. 바이칼로 진출하려던 일본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더 이상 러시아에 대한 도전을 접는다. 이 전투에서 일본 관동군은 거의 5만 명의 전사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1941년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히틀러가 주축국 일본에게 러시아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러시아에 당한 상처가 꽤나 깊었다.


할흐골 전투는 러시아의 뒷문을 안정시켰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러시아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고, 이후 일본은 러시아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쥬코프 장군과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 할힌골 전투를 지휘한 몽골의 초이발산은 후에 몽골의 통치자가 된다. 그는 몽골의 스탈린으로 불리면 공포정치를 이끌었다.


할흐골 전투는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벌어진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전투 이후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을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였고, 방향을 돌려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침공했다. 이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참전하면 전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흐른다. 일본은 러시아에 당한 혹독한 패배를 그새 잊어버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러시아군과 몽골군이 나란히 서있는 할흐골 전승기념탑


할흐골 전투 이후 바뀐 역사의 흐름


1939년 9월 17일, 뒷문이 안정됐다고 느낀 스탈린은 폴란드로 진군한다. 할흐골 전투가 끝난 지 하루만이다. 할흐골의 승리로 인해 러시아는 독일과 일본의 협공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군은 이후 한 곳의 전장, 유럽에 집중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군은 극동에 주둔했던 15개의 보병사단, 3개의 기병사단, 1,700대의 탱크, 1500대의 비행기들 유럽의 전장으로 돌렸다. 극동전력을 유럽의 전선에 투입함으로써 독일의 모스크바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된다.


메데예프 대통령이 몽골참전용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Source: Kremlin.ru

할힌골 전투로 쥬코프 장군은 소련 군대의 스타로 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쥬코프 휘하의 동료들 역시 소련군의 중요한 지휘관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그다노프(S.I. Bogdanov)는 쥬코프의 핵심 참모였는 데, 후에 제2 경비탱크군 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을 패퇴시킨 엘리트 기계화 전술을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할흐골 전투는 러시아군의 전술적 우수성을 보여주었다. 모스크바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고 나서 1년 후 쥬코프 장군은 할흐골에서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한 공격작전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적용했다. 러시아군은 독일군을 중앙으로 몰아넣고 광범위한 지역을 맹렬하게 포격했다.  


일본은 전쟁 방향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동남아시아로 돌렸다.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럽에서는 독일에게 처참하게 깨어지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식민지를 하나둘씩 내어줬다.  최대의 승리는 싱가포르에서였다. 일본군은 이곳에서 135,000명의 영국군을 패퇴시켰다. 영국군 장교와 사병들을 식민지 국민들 앞에서 치욕스러운 행진으로 모욕을 줬다. 아시아에서 서양인에 의한 식민지의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일본은 미국과 필연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큰 성공을 거두지만 역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몽골은 러시아와 연합하여 일본을 무찔렀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길거리에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붙은 중고 프리우스와 랜드크루져가 넘쳐나고 있지만 말이다. 몽골인들은 내게 어찌 그 유명한 할흐골 전투를 모를 수 있냐는 표정이었다. 할흐골 전투가 있었던 그 언덕에는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탑이 서있다. 그 탑에는 몽골과 러시아 군이 나란히 서있다.

 

전승기념탑에서 바라본 풍경, 할흐골 죄측으로 할하강이 흐른다.


러시아 메데예프 대통령이 몽골 베테랑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사진을 보면서 이 전투는 몽골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이벤트라는 걸 느낄 수 있다. 할흐골에 참전했던 몽골군 리더 초이발산은 후에 몽골을 통치하면서 스탈린과 같은 폭압정치로 악명을 높였지만,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할흐골과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할흐골로부터 400km 떨어진 최인접 도시 '초이발산'으로 몽골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그래 봐야 인구가 4만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지만....


공산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그의 이름은 다시 평가되고 있는 듯하다. 과연 그의 이름을 딴 도시가 언제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 논란이 많은 듯했다.


전승기념탑에서 바라본 할흐골, 한산한 폐허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역할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 중에 미국이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을 거의 무찔렀을 때 아무런 힘도 안 들이고 평양으로 들어와 남북이 분단되었다는 정도였다. 우리는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던 많은 전투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영화 - 미드웨이, 과달카날,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 - 들 덕분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할흐골에서 일본이 이겼다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지만, 할흐골은 폐허처럼 버려진 듯했다. 그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할흐골 전승탑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인용문헌>

1. War in the East: How Khalkhin-Gol changed the course of WWII

2.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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