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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May 14. 2017

단양적성비, 남한강으로 나가는 길

단양휴게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에 들러 핫바나 튀김우동을 가볍게 먹고 지나는 여느 고속도로 휴게소 중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와야 다다를 수 있다는 점, 그런데 그게 산 위를 한참이나 오른다는 정도. 그래서 누구는 이 휴게소를 피해 치악산휴게소를 택하지만, 나는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한가한 이 단양휴게소를 더 좋한다.


적성을 소개하고 있는 안내판, 뒤편으로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성이 보인다.


그런데 이 휴게소에는 다른 휴게소에 없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휴게소를 벗어나 역사유적지를 산책할 수 있다. 다른 휴게소와는 다르게 이 휴게소에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다. 단칸 철문을 나서면 길가에 차들이 주차된 게 보인다. 아마도 휴게소에서 일하는 주민들 차일 게다. 그렇지 않다면 이 높은 산중에 차를 주차해놓을 다른 이유가 뭐가 있을까.


적성을 오르는 계단(좌), 적성에서 바라 본 풍경(우)


쪽문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 십여 미터만 가면 단양적성비 안내판이 나온다. 그곳에서 좁은 길을 따라 조금 오른 후 천국에 다다를 것 같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면 돌로 층층이 쌓아올린 산성에 다다른다. 10여분 남짓한 짧은 산책길이다. 적성은 거대한 돌을 잘라 만든 수원성과는 달리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돌덩이를 쌓아 올려 커다란 돌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척이나 소박하다.



적성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빼어나서 이 산성이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신라시대의 유적,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중원고구려비(또는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된 충주가 있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고구려의 힘과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의 힘이 맞붙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물론 이건 역사책에 나오는 내용이고, 사실 이 적성에 처음 들렀을 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아니 이곳에 왜 산성을 축조하고 군대를 주둔하고 기념비 식이나 세웠을까?

처음 산성에 올랐을 때는 사방을 둘러봐도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령을 넘어 이곳에 산성을 쌓은 신라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차라리 충주까지 내려온 고구려의 행동은 이해할만했다. 그곳에는 넓은 뜰이라도 있으니 말이다. 이곳 단양과 제천의 첩첩산중에서 신라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아스러웠다.



중원고구려비를 세웠던 시대(449년 추정, 장수왕), 고구려는 강성했다.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신라를 침공한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직접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0년 후 신라에게 턴(turn)이 돌아왔다. 진흥왕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그 시절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진흥왕은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 단양을 정복하고 이를 기념하여 돌부리에 글을 새겨 넣었다.


국보 제 198호 단양적성비


높이 93cm, 윗너비 107cm, 아랫 너비 53cm 부정형의 단단한 화강암에는 신라의 중원 진출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들에 대한 칭찬과 포상이 기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적성비는 고구려를 버리고 신라에 충성하면 이렇게 융숭하게 대접받을 것이라는 심리전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심리전이란 게 그렇듯이 두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할 때는 주목받았겠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이후에는 쉬이 잊혀졌을 것이다. 그리고 크지도 않고 큰 성의도 없이 새겨진 돌멩이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적성은 돌무더기로 변해갔고, 적성비는 땅 속에서 묻혀 잊혀졌다. 1978년 단국대조사단 중 한 명이 흙 묻은 신발을 털기 위해  튀어나온 돌부리를 주목하기 전까지는.  아낙내들의 빨래판으로 사용되다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에 비해 그나마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 게 다행스럽다고나 할까. 그 당시는 심리전의 도구였을지도 모르지만 빈약한 기록만 남은 이 시대에는 1500년 전 그 시절, 신라의 중원진출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으로 대접받는다.  


적성에서 내려다 본 단양휴게소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었다. 왜 이곳이었을까?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적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다. 주변에 큰 마을도 보이지 않고, 수많은 산 중 이 성재산이  특별할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처음 적성을 방문하고 나서 몇 년이 더 흘러 지난 5월 연휴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다시 들렀다. 사전투표를 해서 마음도 홀가분했다. 이번에는 휴게소에서 적성비까지 오른 후 바로 내려오지 않고 오른편으로 난 중간 평지를 따라 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군데군데 있는 무덤 때문인지 가끔 오싹한 한기도 밀려왔다.


적성 우측으로 평지가 좁고 길게 있고 그 아래로 돌로 축대를 쌓아 성채를 이루고 있다.


적성이 위치한 성재산은 가파르지만 높지(323m)는 않다. 산 중턱에 오르면 폭 20미터 내외의 좁고 긴 평지가 산 둘레를 따라 나있다. 그 아래로 돌로 축대를 쌓아 성채의 모양을 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 병사 숙소 등 주둔시설이 있었을 것 같았다. 계속 나아가자 다시 길이 오르막으로 바뀌고 이러서 성곽 사이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보였다. 그 옛날에는 성문이라도 있었을까?


남한강 방향으로 나가는 출입구


서늘한 한기를 느끼며 간신히 성채에 올랐다. 물리적인 저항감보다는 심리적인 저항감이 더 컸다. 저곳에 가볼만한 가치가 있을까, 라는. 어쨌든 끝장을 보기 위해 저녁노을을 따라 성벽 위로 올라섰다. 성벽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왜 신라인들이 이곳에 산성을 쌓고 군사들을 주둔시켰는지를.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우람한 산만 보이던 갑갑한 풍경은 어느덧 사라지고 드넓은 남한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4킬로미터가 넘어가는 죽령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고향을 갈 때면 지나가던 그 강이 보였다. 이 강물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가면 도담삼봉이 나오고, 또 더 올라가면 충주댐이 나온다. 그 충주댐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가면 팔당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두물머리가 되고, 그 한강을 따라 물길은 서울로 이어진다.


적성에서 바라 본 남한강


신라인들에게 이곳이 왜 중요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남한강을 통해 한성으로 나아가는 요충지였다. 아마도 MB가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었다면 이 강물은 낙동강과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행주산성이 그렇고, 부소산성이 그렇고, 공산성이 그렇듯이 이 산성도 강의 요충지를 지키는 산성이었던 것이다. 멀리서 배와 군사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는 곳, 신라인들은 이곳 적성을 확보함으로써 한반도 중심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단양의 적성(赤城), 지금은 성채만 남고 그것마저도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성안에 있었음직한 막사와 누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 터만 덩그러니 남아 그 옛날은 어떠했을지 짐작케 할 뿐이다.


찾는 이도 별로 없는 이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단양휴게소가 있기 때문이다. 중앙고속도로를 지나고 있다면 단양휴게소를 들러보자. 잠시 짬을 내 역사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는 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행운이다. 지역특산품 매장에서 판매하는 더덕과 버섯은 덤이다. 적성에 올라 죽령을 바라보며, 또 남한강을 바라보며 1500년 전에 벌어졌던 옛 역사를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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