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화가 인도와 베트남의 운명을 바꾸다.
캐슈너트, 브라질에서 재배되고 포르투갈에 의해 수출되었고, 미국에 의해 상업화되어 인도를 풍요롭게 했다. 2000년대 베트남이 캐슈너트 산업에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는 그랬다.
캐슈 나무는 16세기 포르투갈 탐험가에 의해 브라질에서 인도로 도입되었다. 인도에 건너온 캐슈 나무는 인도양에 면한 항구 도시 콜램(Kollam)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콜램은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와 아랍의 탐험가 이븐 바투타가 거쳐간 도시이긴 했지만 별 특별할 게 없는 곳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이 견과류는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 제너럴푸드 사의 지원으로 인도의 한 기업가가 캐슈 원물을 수집한 후 딱딱한 껍질을 벗기게 한 게 그 시작이었다. 제너럴푸드 사는 특허받은 진공포장 기술을 적용하여 뉴저지 호보컨으로 캐슈너트를 가져온 후 로스팅하고 포장하여 <Baker’s Vitapack Cashews>라는 브랜드로 미국 전역으로 판매했다. 지금은 65억 달러 시장으로 성장한 캐슈너트 산업의 시작이었다.
가장 큰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캐슈너트는 건강 스낵으로 인정받아 너트 바(Nut bar)부터 버터와 우유 대용품까지 폭넓게 소비된다. 가장 큰 시장인 인도에서는 결혼식이나 생일에 사용되는 케이크와 디저트에 점점 더 많은 양의 캐슈너트가 사용된다.
인도 콜램(Kollam)은 한 때 세계 캐슈너트 생산량의 60%를 담당했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영광을 오늘날 콜램에서 느끼긴 어렵다. 글로벌 경쟁에서 밀려 쇠락한 도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캐슈너트의 전성기 동안 콜램에는 800여 개에 이르는 가공공장이 하루 온종일 가동되었다. 겨우 100개 남짓 돌아가는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글로벌화가 캐슈너트의 고장 콜램을 어떻게 무너뜨렸는지를 보여주었다(1).
수십 년 동안 콜램은 세계 캐슈의 수도였다. 콜램에 있는 공장 대부분은 캐슈의 껍질을 부수고, 과피를 벗기고, 크기와 모양에 따라 캐슈를 분류한다. 이는 제너럴푸드 사의 린세이 존슨이 1930년대 지원했던 방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콜램에 대대로 자리 잡은 <아프리카 캐슈 사>의 경영자 바산타 쿠마르 라쥬(Vasantha Kumar Raju)는 인도의 캐슈너트가 세계를 제패한 던 때를 회상한다. 라쥬는 현재 8개의 공장에 2,500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
사람 손으로 작업하면 버려지는 캐슈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품질도 기계로 하는 것에 비해 우수합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이 캐슈 덕분에 일자리를 구합니다.
콜램에서 캐슈를 가공하는 일은 전적으로 수작업에 의지했다. 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기업가들은 수작업에 만족했다. 숙련된 노동자들은 캐슈 껍질을 벗기고 분류하는 일을 빠르고 정확하게 했고, 품질도 세계 시장에서 충분히 받아 줄만큼 훌륭했다. 1960년대 콜램은 수백 개의 작은 공장들이 있었고, 캐슈를 볶을 때 나는 시큼한 연기가 해안가 어디에서나 피어올랐다. 전성기 때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잘 나가는 비즈니스였다.
어두운 면도 있었다. 캐슈 산업은 호황을 누렸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그대로였다. 노동시간은 길었고 노동착취도 심했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치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콜램에는 두 개의 노동자 정당이 캐슈 노동자들과 노동자 친화적인 공무원을 놓고 표를 다투었다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올리고자 지방 정부는 두 개의 대형 캐슈 가공공장을 설립했다. 이 두 회사는 지역 산업을 견인했고, 정부는 최저임금을 개인 기업까지 적용했다. 임금은 올랐고 헬스케어도 증진되고, 연금제도도 도입되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힘들긴 했지만 캐슈 산업은 빈민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지역에는 극장과 공공도서관, 호텔이 들어서면서 콜램은 인도에서 가장 앞서가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990년 중반부터 베트남인들이 콜램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가공업자들은 생산농가를 대표하는 것으로 위장했다. 베트남은 콜램에 캐슈 원물을 공급하는 중요 공급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콜램의 기술자들은 캐슈를 어떻게 가공하는지 기쁜 마음으로 시연했다. 그 방문객 중에는 엔지니어도 있었다.
1980년대 초부터 베트남 정부는 가난한 지역 농민들에게 캐슈 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했다. 1990년대부터 몇몇 가공업자들이 인도 콜램에서 배워온 방법 그대로 베트남에서 캐슈너트 가공을 시작했다.
서구의 대형 슈퍼마켓 - 월마트, 까르푸, 테스코 등- 들은 글로벌 공급망을 선택하는 데 유연했고, 또 가격을 깎는데 무자비했다. 베트남 정부는 수출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부의 요청을 받은 베트남 기업가는 설비 자동화가 해법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이탈리아 회사로부터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공정을 개량했다. 베트남의 기술 수준에서 공정개선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했다.
설비 자동화는 게임의 룰을 바꾸었다. 1990년대 캐슈 원물을 농민으로부터 구매해 브로커를 통해 인도 가공업자에게 수출하던 베트남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자국의 자동화된 시설에서 캐슈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푸악(Phuc Ac) 식품무역 사의 CEO 르쾅유엔(Le Quang Luyen)은 인도 콜램의 경쟁자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수가공에 의존하던 캐슈너트를 거대 자본을 투입해 자동화했다.
종업원이 캐슈와 직접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공장을 자동화했습니다.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데 필요한 식품위생 기준을 맞추려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동화된 푸악 사의 공장에서는 단지 30명의 종업원만 일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는 하루 50톤의 캐슈 원료를 처리한다. 푸악 사는 미국, 호주, 일본, 네덜란드 등 그동안 공략하기 어려웠던 나라를 중심으로 수출에 집중하고 있다.
인근에 있는 마이 레(My Le) 그룹에서는 170명의 노동자가 예전에 2,000명이 필요했던 일을 하고 있다. 수작업으로 할 때는 노동자 한 명이 하루 10 kg의 캐슈를 가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한 대의 기계는 하루 5톤의 캐슈 껍질을 벗길 수 있다. 그리고 분류기에서는 캐슈 품질에 따라 스무 가지 이상으로 세분한다. 최종 단계에서는 여전히 노동자들이 눈과 손이 필요하지만 분류기는 국제시장에서 필요한 품질과 위생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베트남은 인도 콜램을 제치고 캐슈 킹(Cashew King)으로 등극했다.
인도의 캐슈(커널) 수출량은 1999년에 97,000톤에 달했다. 이는 10년 전에 비해 두 배나 증가한 것이다. 세계 캐슈 시장 점유율은 80%에 이르렀다. 인도 전체에서는 173,000톤의 캐슈 커널이 가공되는 데 역시 세계 최대였다. 하지만 현재는 사정이 완전히 변했다. 베트남이 세계 캐슈 수출의 70%를 담당하고 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슈퍼에서 캐슈너트를 구입한다면 아마도 베트남 산일 가능성이 높다.
인도는 여전히 가족 중심의 캐슈 가공을 고집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기계에 대해 무지하다. 콜램 역시 느리지만 자동화 기계를 도입하고 있다. 그렇지만 장애물은 여전하다. 친노동자 정치인은 자동화를 반대하고 있고, 높아진 임금은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공장 이전을 재촉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콜램의 쇠락은 인도 정부의 보호정책과 글로벌 경제의 현실을 외면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콜램에서는 정치가들이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걱정해 자동화에 반대했다. 자동화가 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직장을 잃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2006년부터는 인도 중앙정부는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캐슈 원물 수입에 9%의 관세를 부과했고, 콜램이 속한 케랄라 주정부는 35%의 임금인상을 결정했다. 자동화 설비를 도입할 수 없도록 노동자 해고도 어렵게 규제했다.
인도의 캐슈 가공은 1백5십만 톤에서 정체되고, 캐슈 커넬 수출은 8만 2천 톤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베트남은 1백4십만 톤의 캐슈 원물을 가공했는 데 이는 5년 전에 비해 두 배나 증가한 것이다. 수출 역시 두배로 늘어 34만 톤을 넘었다.
베트남 빈 푸옥(Bihn Phuoc)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한 때 캐슈 수확철이면 단기 이주노동자로 채워지던 공장에서 이제는 훨씬 적은 수의 공장 노동자만 일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푸악 사는 공장자동화에 4천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단지 30명만 고용하고 있을 뿐이다. 기계화된 슬라이서, 컨베이어 벨트, 튜브, 활송 장치, 슬라이드, 센서, 자동분류기 가 노동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인도 콜램과 베트남 빈 푸옥, 두 도시를 비교하면서 글로벌화가 동떨어진 두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었다. 빈곤에 허덕이던 한 도시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켰지만, 또 냉혹한 글로벌 경쟁에 의해 한 도시를 순식간에 거덜 나게 만들었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동화 시설 도입을 어렵게 했던 인도 콜램 시는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뜻하는 바를 이루진 못했다. 글로벌화는 세계 시장의 확장을 가져왔지만 공급망(supply chain)이 국가 간에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직면하게 됐다.
글로벌리제이션은 또 다른 현상을 촉발하기도 한다. 필자가 ODA 전문가로 라오스에 머무르는 동안(2014-2015) 베트남은 라오스에 수만 그루의 캐슈 묘목을 지원했다. ADB의 지원에 힘 입어 수천 헥타르의 범람지에서 나무들이 뽑히고, 그 땅에는 베트남으로부터 기증받은 캐슈 묘목이 심어졌다.
갑자기 2ha의 땅을 받게 된 농민들이 뜨거운 땡볕 아래 오토바이를 타고 몰려들었다. 라오스 공무원들은 농민들에게 막대기로 자기 땅을 표시하게 했다. 서부 개척시대처럼 말을 타고 자기 땅에 깃발을 꽃지는 않았지만, 농민들은 모두 각자의 나무 막대기를 들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한 섬유회사에서 베트남에 캐슈 가공공장 신축을 검토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회사는 결국 투자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시장 조사를 통해서 베트남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그런 만만한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은 라오스에 묘목을 지원하면서 생색을 냈겠지만, 결국 그 캐슈는 베트남 브로커들이 수집해 갈 것이고 베트남 공장에서 가공되어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될 것이다. 베트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비즈니스 기반, 즉 공급망을 공고히 한 것이다. 그럼 베트남은 가난한 라오스 농민을 도와준 것일까? 아니면 그냥 글로벌화의 공급기지로 라오스를 편입한 것일까? 같은 현상이지만 서로 다른 시각이 가능하다.
WSJ의 기사를 보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캐슈 가공산업의 번성과 쇠퇴가 그 지역에 사는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의 캐슈너트 산업은 강력한 경쟁력에 힘입어 계속 성장할 것이고, 이에 따라 베트남 농민들도 캐슈 재배를 통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란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모든 비즈니스가 마찬가지겠지만, 농식품산업 역시 과감하게 배팅해야 할 때가 있다. 한순간 실기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순식간에 낙오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농업은 콜램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1) How Cashews Explain Globalization, Wall Street Journal(2017. 12. 1.)
(2) NUTS & DRIED FRUITSGLOBAL STATISTICAL REVIEW2015/2016
(3) How Cashews Explain Globalization(https://www.youtube.com/watch?v=sy6FiDjWN4k)